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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3막, 새로운 길
  • ['나의 나눔 실천 이야기' 수기 | 202307ㅣ글 정은숙님ㅣ그림 박영서님]
“오늘 수업은 한글 받침과 소리의 차이입니다. 먼저 ‘덥습니다’처럼 앞 자에 받침이 있으면 이어지는 문장은 ‘습니다’가 됩니다. 그러나 ‘옵니다’처럼 받침이 없으면 ‘ㅂ니다’로 표기합니다.” 작년 가을 내가 가르치는 다문화가족 성인 한국어 입문 반 교실의 한 풍경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분들에게 마치 아이들을 어르듯 손짓과 몸짓을 섞어가며 한국어 문법을 설명했다.
창밖, 늦가을의 숲에 크고 작은 금강초롱꽃들이 서로 뽐내며 청초하게 피어 있었다. 그 꽃잎들은 마치 다문화 센터의 Zoom 화면 너머 나이지리아,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등에서 온 아홉 명 수강생들의 서로 다른 모습 같았다. 문득 55년여 년 전, 동네 오빠들과 함께 가을 시골 논두렁을 따라 서툴게 굴렁쇠를 굴리던 내 유년의 그리움도 째깍째깍 그려졌다. 나도 이제 칠순을 향해 가느라 가르치는 일이 그리 쉽진 않다. 그러나 그분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따스한 세상이기에 힘을 얻는다.
“자, 이번에는 소리의 구분입니다. ㄲ은 휴지가 안 흔들리죠? 여러분들도 따라서 해보세요. ㅋ은 어때요? 심하게 펄럭이는 것이 보이시죠? 바로 그 차이예요.” 나는 연이어 된소리와 거센소리의 차이를 설명했다. 얇은 휴지를 내 입 가까이에 대고 훅 불듯 두 자음들을 발음하여 그 휴지가 흔들리는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학생들도 신기한지 소리 내어 여러 번 흉내를 내면서 ㄲ과 ㅋ도 써보았다. 물론 그분들의 발음은 두 살 배기 내 손녀의 옹알이 같고 쓰기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그러나 배우려고 애를 쓰는 열정은 너무 아름다웠다.
오늘도 나는 작년에 저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의 첫인상을 기록해두었던 글을 읽어보며 씩 웃었다. 당시 몇 번 수업을 해도 Zoom 수업 여건상 학생들과 이름이 잘 연결되지 않아 학생별 첫인상들을 기록해둔 목록이었다.
사실 그 메모는 오래 전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서 배운 지혜였다. ‘쇼펜하우어’는 놀랍게도 오래 전에 기록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그는 그의 명저 「소품과 부록」(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서 사람들의 첫인상을 기록해두면 그 사람을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게 된다고 했다. 확실히 기록은 기억보다 단단한 것 같다.
오래 전 나는 우리 집 옆집에 사는 다문화 가정 분들과 참 친하게 지냈다. 물론 그 후 우리 집이 이사를 했지만 지금도 그 가족들과 연락하며 지낸다. 그래서인지 종종 그분들을 따라 다문화가족 문화 행사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다른 다문화가족들에게 복잡한 행정절차 등도 도와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서툰 언어와 문화 차이로 크고 작은 차별을 겪는 다문화 가족들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마치 그분들의 하소연을 해소하라는 시험 문제지를 받아 쥔 느낌이었다.나는 결국 힘겨워도 따뜻한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은퇴 후 한국어 강의 자원봉사를 다짐했다. 그 무렵 나는 무릎 관절염으로 긴 세월 운영하던 작은 복지 센터를 막 접었을 때였다.그리고 예순의 나이에 내가 다짐했던 그 한국어 교사 자격시험에 도전했다.그런데 나이 든 분들의 합격률이 매우 낮다는 주변의 정보가 나를 괴롭혔다.예상대로 시간이 갈수록 무리한 공부로 가끔은 몸이 떨리고 코피가 날 때도 있었다.남편은 내 건강을 걱정하는 눈치였다.심지어 지인들 중에는 이제 좀 쉬지 무슨 자원봉사냐며 핀잔을 주는 분들도 계셨다.
그러나 나는 그냥 힘겹고 소외된 그 다문화가정 분들의 편에 서 있고 싶었다.그리고 마침내 각고의 노력 끝에 최종 합격했다. 그날 나는 나도 모르게 펑펑 울었다. 그 후 다행히 어느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 교사로 자원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단단히 박힌 닻을 들어 올려 내 인생3막 새 출발의 돛을 달았다.
나는 처음에는 나만 그분들에게 내 작은 재능을 기부하고 나눠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그분들을 보며 나를 성찰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차츰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어만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베갯잇에 눈물을 흘리는 그분들이 자신들을 다독여주는 사랑도 목말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앞으로도 끽끽 소리 내며 잘 열리지 않는 그 분들의 마음 서랍을 틔워주는 희망의 돌쩌귀가 되고 싶다.
그런데 나는 2년 전에는 지역아동센터에서 6명의 다문화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모두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로 어머니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물론 아버지들은 한국인이었지만 거의 불규칙한 노동일을 하셔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운 가정들이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한국어 강의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이 먹을 6인 분의 치킨과 과일을 싸서 준비해 갔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면 파티처럼 함께 놀며 그 음식들을 나눠먹었다. 하루는 식사 도중 나와 연세가 비슷한 지역아동센터장님께서 방에 들어오시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오래 잡아주신 후 나가셨다. 그리고 처음에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차츰 나를 할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같은 호칭이라도 우리 손주들에게서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봄길’ 첫 연) 우리에게 늘 따스한 이야기를 전하는 시인 정호승의 시 ‘봄길’의 일부이다.
물론 저 시는 가수 이동원에 의해 노래로도 발표되었다. 가끔 아득한 퉁소 소리로 전주곡을 칠한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지나간 내 시간들이 흑백필름처럼 스쳐가는 것 같아 좋다. 나는 그렇게 예순이 넘어서야 그 시와 노래처럼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새로운 길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 길은 내 인생 3막의 작은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나는 실천이 없이 거리의 플래카드에만 나부끼는 나눔의 활자는 공허하다고 감히 생각한다. 사실 지금 센터의 봉사자들은 거의 자식 같은 30대~40대 분들이다. 당연히 아날로그 세대인 나는 그분들처럼 디지털에 능숙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컴퓨터로 강의 일정 계획과 수업 결과표를 짤 때마다 늘 더듬거린다. 그러나 나는 힘겨운 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일이 너무 행복하다.
살면서 우리가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뛰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가족들만이 아닌 타인의 아픔도 조금이나마 더 어루만져준다면 세상은 더욱 따스해지리라 믿는다. 나는 이 길이 긴 세월 세상에서 내게 건네준 감사의 빚을 조금씩 갚아가는 겸허한 사명이라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