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서의 군 복무를 마치고 2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눔의 행복함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비행을
하고자 활주로를 정비하고 있는 사회복지학과 학생이다.
발달장애아동, 중증질환독거노인, 저소득층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원봉사를 다방면에서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 하루를 보내는 열혈청년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이 열혈청년도 혈기를 어디에다 쏟아야할지
몰라 고민할 때가 있었다.
지금부터 군 복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겠다.
바야흐로 때는 2011년 여름,
견디기 힘든 무더위를 지나 우기가 다가왔다.
비도 비지만 태풍까지 매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시기이기에 우리 부대에서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비가 내리면 야외훈련을 하지 않아 좋지만, 너무 많이
내리면 수해 복구 작업을 나가야했기 때문이다.
일단 훈련부터 피하고 보자는 심정이었기에 장마가
시작하는 날은 휴식이 필요한 우리에게 가뭄에 단비
같았다.
그렇게 집중호우가 계속 되었고 우리는 불안함과
초조함에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하나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서울의 우면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방배동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수도권의 군 장병들이 긴급 투입되어 수해복구에
나서야했고, 우리 부대 또한 투입되었다.
그때 당시 뉴스에도 떠들썩했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장에서 느낀 것은
뉴스의 딱 10배였다. 도로에는 가구들과 온갖 쓰레기들
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고급승용차와 일반승용차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길거리에 뒹굴고 있었다.
산사태와 홍수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는 인간도
무력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수해복구는 시작되었고,
우리가 가장 먼저 투입된 곳이 인근 빌라였다
특히 지하주차장에는 물이 가득차서 차주들은
자포자기상태였고, 어떻게든 집에 물만 빠지면
좋겠다고 했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산사태로 떠내려 온 나뭇
가지들과 흙들을 삽과 여러 가지 장비들로 정리했다.
빌라 주민들은 같이 복구 작업을 하면서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그 중에 어떤 아주머니께서는 통닭 50마리를
군 장병에게 돌리셨고, 그 다음날에도 피자 50판을
돌리셨다.
이후로 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대모(大母) - 통 큰
어머님”이라고 불리었다.
이렇게 감사의 표시와 후한 인심을 보여주시는 분들도
많으시지만,
장마가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미리 해외로 갔다가
한국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 되면 유유히 귀국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에 개인주의가 팽배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정신없게 빌라 인근을 정리하는 도중 한 할머니께서
내 손목을 붙잡으셨다. 자신의 집으로 날 이끌었고,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자연스레 따라갔다. 할머니의
집은 지하 단칸방이었고, 침수로 인해 집안이 흙탕물로
가득했다.
할머니께서는 “양수기가 고장 났으니 손으로 직접
퍼내야 되니까 빨리 해라”라고 명령(?)하셨다.
기분이 좀 묘하긴 했지만 바가지로 열심히 퍼냈다.
퍼내고 또 퍼냈지만 하루 이틀만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3일간 방배동 수해복구만 계속 나갔기에
병사들과 간부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쳤고,
끝나기만을 바랬다. 생활관에 돌아온 우리의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수해복구를 다녀온 사람 중에는 피부병에도 걸리고
몸살감기증세까지 보였기에 강행군은 당연히
무리였다.
부대에서도 더 이상은 건강상 무리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상의 수해복구는 자원자에 한해
무리지어 현장에 투입한다고 했다. 역시나 병사뿐만
아니라 몇몇 간부들마저 지쳤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평소의 이기적이었던 나라면 당연히 가지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 까딱하기도 힘든 상태인데 또 수해복구라니,
말도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자꾸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게 물 퍼라고 명령하신 그 할머니 말이다.
아무생각 없이 “상병 정지석 수해복구 자원봉사
참여하겠습니다.”라고 외쳤고,
생활관의 모두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렇게 고생을
자처한 나는 그 다음날도 방배동에 가서 그 할머니를
찾아뵈었고 열심히 물을 퍼냈다. 한참 열심히 작업하다보니 점점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할머니께서는
“내일은 가구 들어낸다.”라고 말하셨다.
할머니께서 명령하시니 왠지 나도 모르게 신났고
다음 날이 기대되었다.
그 다음 날에도 할머니 집으로 방문했고,
할머니를 찾았지만 아직 오지 않으셨는지 안보였다.
밤사이에 물이 다시 고여 있어서 바가지로 열심히
퍼냈다. 그렇게 물을 퍼내는 도중에 부엌을 지나다가
식탁 위에 초코파이 하나와 쪽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쪽지에는 “먹어라. 이따가 오마”라고
적혀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 왔다가 가신듯했다.
군인에겐 역시 초코파이라 했던가.
초코파이를 보자마자 배가 고팠다. 하지만 할머니와
나눠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놔두고 혼자 열심히 물을
퍼내고 가구도 정리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같이 자원봉사를 나온 동료 병사가
시간이 다되었으니 복귀하자고 무전기로 연락이 왔다.
결국 할머니를 보지 못하고 복귀했다.
자원봉사 마지막 날이 그다음 날이라 왠지 할머니랑
마지막이란 생각에, 초코파이를 먹지 않고 다음 날에
들고 갔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이웃집 아주머니께 물어보았고,
할머니께서 미끄러지셔서 뇌진탕으로 쓰러져 입원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군인의 신분인
나로서는 그 병원으로 당장 가볼 수도없는 상황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수해복구 자원봉사를 마치게 되었다.
자원봉사는 마쳤지만,
할머니와의 관계는 끝난 것 같지가 않아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결국 그 다음 주 토요일에 외박을 신청하여
할머니께서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고,
쓸쓸한 빈 병상만이 날 맞이해주었다.
이틀 전에 천국으로 가셨다고 옆 병상 아주머니께서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초코파이를
뜯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할머니의 온기가 담긴 초코파이는 내 인생에 최고로
맛있는 간식이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다. 비록 조그마한 초코파이였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의 꿈을 확신했고 나의
길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할머니의 초코파이.
마치 딱딱한 조개껍질 속에 숨겨진 진주알 같았던,
퉁명스러움 속에 숨겨진 따뜻한 사랑이었다. 내 인생의
목표이자 사명은, 사랑이 담긴 달콤한 초코파이 같은
따스함을 전하는 행복파트너(Happy-Partner)가
되는 것이다.
지구촌 모든 곳이 사랑으로 가득해지는 그날까지
나는 아낌없이 나누는 사회복지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