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슨생님, 아직도 맘이 아파요?” 한국어 수업 중 중국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약간의 염려로 맘이 뒤숭숭했던 차에 그런 말을 들었기에 나는 그녀가 독심술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놀란 나를 보며 그녀는 내 어깨를 가리켰다. 아뿔싸, 지난 수업 때 어깨가 아파서 몸이 아프다고 했는데 그녀가 ‘몸’을 ‘맘’으로 착각한 것이다.
나는 웃으며 ‘맘’이 아니라 ‘몸’이라고 한다고 일러주었고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고 그녀도 깔깔 웃었다. 이렇듯 이주여성들과 함께일 때면 어김없이 재미있는 해프닝이 벌어지곤 한다.
결혼 전까지는 거리에서 이주여성들을 보아도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결혼 후 아이가 아파 황급히 병원에 간 어느 날 엄마와 아빠를 반반 닮은 이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인 귀여운 아이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나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언젠가 뉴스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고충을 보았다. 엄마가 외국인이기에 아이들 역시 모국어에 서투르고 생김새가 다르기에 놀림을 받거나 왕따를 당하는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났다.
엄마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국민이면서도 마치 이방인 취급을 당하며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야 한다니, 나는 그토록 귀여운 아이를 바라보며 너무 짠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내가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가슴 한 편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교회 복지재단에서 이주여성들을 위한 봉사자를 모집했다. 알 수 없이 차오르는 설렘과 기대로 나는 무작정 봉사 신청을 했다. 처음 만난 이주여성은 중국 여성과 필리핀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눌한 말투, 인사 한 마디 나눌 뿐이었지만 그녀들의 미소가 내 안의 모성을 자극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 맡은 일은 이주여성들이 한국어 수업과 요리수업을 하는 동안 아기를 돌봐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귀여운 아기를 안은 기쁨도 잠시, 오랜만에 아기를 한참 동안 안고 있자니 허리가 아프고 힘이 들었다.
봉사를 신청할 때만 해도 아기를 안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을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이들과 만들기도 하고 그림도 그려주며 사랑으로 돌봐주는 훌륭한 선생님, 아마도 머릿속으로 그런 멋진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순간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닌데.......’ 라는 생각에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날 밤, 가족들이 모두 잠든 고요 속에서 낮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갓 스물을 넘은 어린 엄마의 눈망울, 내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잠들었던 따스한 아기의 체온....... 곰곰 생각해보니 아기를 돌보는 일은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이주여성들이 한국말과 요리를 배우면 한국 생활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고 엄마가 행복하면 아이도 행복해지는 것은 두말 할 필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난 대한민국 아줌마다! 아줌마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그렇게 맘먹고 나니 더 이상 맘이 흔들리지 않았고 아기를 돌보는 게 너무 신이 났다. 옹알이를 하며 내 눈을 바라보는 젖살 오른 통통한 아기를 꼭 안고 귀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축복해 주었다.
그 후 매주 새로운 이주여성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슨생님, 평소에 아기가 많이 칭얼대는데 여기 오면 울지를 않네요.” 한 이주여성이 그 말을 했을 때는 나의 진심어린 마음을 그녀가 알아주는 것 같아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외국여성들과 봉사자들이 점차 늘면서 나는 한국어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봉사라고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할 수는 없기에 전문적인 한국어 수업을 위해 봉사자들은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을 도전하게 되었다.
동영상으로 매일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이주여성들에게 한국말을 더 쉽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 중국 여성과 한국어수업을 하던 날의 긴장감이 지금도 생생하다. 모국어라는 이유로 아무 준비도 없이 룰루랄라 수업에 들어갔던 나는 한국말을 꽤 잘하는 한 중국 여성의 쉴 새 없는 질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는지 한국말을 완전히 배워서 일을 하는 것이 꿈인 그녀는 돌쟁이 아기를 키우면서 밤에 아이를 재워놓고 미리 교재를 두 과씩 예습해서 오는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봉사 전날이면 동영상 강의와 교재를 놓고 씨름을 하곤 했다. 또한 한국어 수업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고 쉽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불현듯 우리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던 때가 떠올랐다. ‘맞아! 아기들은 책을 보면서 달달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말을 하잖아?
중국 아기는 중국말, 미국 아기는 미국말을 저절로 하잖아!’
나는 외국여성들을 마치 아기 대하듯이 대하기로 했다. 방법은 짧은 단어와 문장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최고였다. 그야말로 아기에게 처음 말을 가르칠 때처럼 “물마시고 싶어요? 밥 먹고 싶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등등 비슷한 문장에 여러 가지 상황만 바꾸어서 계속 반복을 했다.
또 봉사자들끼리 수업 방법에 대해 다양하게 연구하던 중 이주여성들이 한류 문화를 좋아한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기도 했다. 한국 스타에 열광하는 이주여성들을 위해 재미있는 한국 드라마나 가요 등으로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하면서 거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문장을 서로 역할을 맡아 주고받으며 한국말을 배우는데 연기처럼 자기 역할을 하는 와중에 서로 실수도 하며 얼마나 즐겁게 웃는지 모른다. 요리 수업 역시 한국어 수업의 연장선이었다.
요리를 할 때에 배우는 말은 ‘당근’, ‘양파’, ‘고기’, ‘식용유’, ‘뒤집개’, ‘썰다’, ‘튀기다’, ‘뒤집다’, ‘볶다’, ‘끓이다’ 등과 같은 실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이기 때문에 아주 효과적인 언어습득의 기회가 된다.
그렇게 즐거운 이주여성들과의 만남이지만 가끔은 가슴이 먹먹해질 때도 있다. 늘 씩씩하게 웃으며 열심히 수업을 하던 필리핀 여성이 하루는 기운 없이 웃지도 않고 시무룩하니 말없이 엎드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몇 번을 묻자 몸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아기 보랴, 공부하랴 많이 힘들죠? 주말에 남편 있을 때 잠 좀 푹 자세요.” 라고 했더니 “선생님, 주말에도 식당에 일하러 가야 돼서 못 쉬어요.”라고 하는 거였다. 내 딴에는 열심히 위로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녀의 삶의 무게를 잘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 후로는 수업 시작 전과 후에 틈틈이 힘든 일은 없는지 물어보며 다독여 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고 마음과 마음이 전해져 그전보다 더 친밀함이 자라게 되었다.
하루는 중국 여성들이 우리들에게 중국 요리를 가르쳐주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중국 만두를 맛보았는데 달걀지단, 오이, 새우 등 우리나라 만두와 사뭇 다른 재료를 넣은 만두는 굉장히 고소하고 깔끔한 맛이 났다. 맛있다는 우리의 말에 연신 웃음을 짓던 그녀들에게서 커다란 자부심이 느껴졌다. 많은 곳에서 다문화가정을 위한 봉사를 하고 있지만 만약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늘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면 과연 기쁠까? 아마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것 같다.
‘내가 만약 언어도 통하지 않는 만리타국에서 산다면? 문맹처럼 답답한 생활을 하는 타국에서 김치와 아리랑을 소개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런 상상을 해 본다. 정말 뿌듯하고 그런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애정이 싹틀 것이다.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주고 그들을 우뚝 세워주는 일들이 이젠 우리나라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좋겠다.
언젠가 요리수업 시간에 이주여성들과 송편 빚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필리핀 여성이 여러 가지 종류의 반죽을 섞어서 알록달록 너무나 아름답게 빚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라가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모두가 각기 고유의 아름다움과 빛나는 지혜를 지녔음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에 와 준 고맙고 반가운 이주여성들과 외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급 교육도 물질적 지원도 아닌 따스한 미소와 손 꼭 잡아주는 친구가 아닐까?
가족과 나라를 떠나 낯선 곳으로 온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존중해준다면, 우리나라는 그윽한 향기가 진동하는 오색찬란한 아름다운 무지갯빛 나라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향기를 만발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슨생님, 이거 형태소 맞아요?” 나를 긴장시키는 그녀들! 사랑스런 그녀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모국어와 안쓰러운 씨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