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다니는 작은 보육원에서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각자의 사연을 간직한 열여섯명의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지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재취업에 성공한 뒤부터 이곳과 인연을 맺었으니 벌써 3년이 넘게 이 곳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한두 번 왔다가 가는 사람이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는지 처음엔 냉랭했던 아이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마음을 열고 ‘아저씨’에서 ‘삼촌’으로 호칭도 변했습니다.
체육대회날은 아이들과 보육원 선생님, 장기적으로 보육원을 찾는 분들까지 오랜만에 보육원이 시끌벅적했습니다.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줄다리기, 피구, 축구 등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해질 무렵에는 함께 동네 목욕탕으로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피로를 풀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보육원 식당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해간 고기와 채소로 바비큐 파티가 열렸습니다. 열심히 고기를 구워서 나르는데도 금방금방 비워지는 접시들을 보면서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아이들의 시선이 TV에 박혔습니다. 브라질 월드컵에 관한 TV프로그램이었는데 한참 공차는 것을 좋아할 나이의 아이들이라 그랬는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식사와 뒷정리까지 모두 끝난 뒤에는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평소에도 저를 잘 따르던 현우가 제 옆으로 왔습니다.
“삼촌, 월드컵 거리응원 해보셨어요?”
축구를 무엇보다도 좋아하고 매일 공만 찼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현우는 좀 전에 TV에서 보았던 월드컵 거리응원이 궁금했던가봅니다.
“그럼, 2002년에도 서울시청광장에서 응원했고, 2006년에도 했지. 지난 월드컵도 했었고.”
월드컵 거리응원했던 이야기를 듣는 현우는 무척이나 부러운 얼굴을 했습니다. “삼촌, 이번 월드컵에 우리 보육원 아이들도 거리응원 가보면 안돼요?” 축구를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아이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지만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날은 그냥 서울로 올라왔지만 현우와 아이들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보육원 선생님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보육원 선생님도 아이들의 소원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아이들을 인솔해서 낮도 아니고 밤부터 새벽까지 서울에서 응원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안전, 비용 등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길거리 응원을 경험시켜줄 좋은 방법이 없을까 다른 자원봉사자분들과 보육원 선생님과 의논한 끝에 보육원 아이들 중에서 중학생 아이들만 참여시키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을 서울까지 데려올 교통편은 제가 회사에 말해서 회사의 업무용 승합차량을 이용하기로 했고, 다른 봉사자분들이 함께 응원에 참여해주시고 보육원 선생님도 오시기로 했습니다.
아이들과 길거리 응원을 하기로 했던 날에는 한국 대 알제리 경기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조퇴해서 차를 몰고 충청도로 내려가니 아이들은 벌써 보육원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데려가지 못하는 초등학생 아이들에게는 다음번 월드컵 때는 꼭 데려간다고 약속하고는 붉은색 응원복과 응원도구를 전해주었습니다.
아이들을 태우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오늘은 누가 골을 넣을 것인지, 우리나라가 몇 대 몇으로 이길지 쉴틈없이 이야기하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보살피러 함께 올라오는 보육원 선생님도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함께 즐거워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합류해서 일단 찜질방에서 잠도 자고 시간을 보낸 뒤에 광화문에는 자정쯤 나가기로 했습니다.
광화문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붉은색 응원복을 입은 아이들과 저, 그리고 다른 봉사자분과 보육원 선생님도 응원에 열을 올렸습니다. 경기가 시작하는 새벽 4시까지 이들은 쉬지 않고 응원가를 따라 부르며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부터는 멀리 보이는 전광판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열심히 응원을 하는지 이 아이들에게 이런 열정이 있었나? 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90분간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은 목이 쉴 정도로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우리 대표팀이 골을 먹을 때는 울먹이고, 후반에 역습을 할 때는 기가 살아나서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지요.
결과는 2:4로 대한민국의 패배, 주변에 길거리 응원을 나왔던 사람들은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고 보육원 선생님도, 저도, 다른 봉사자들도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는데 아이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졌는데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후반에 두 골 넣고 역습했잖아요.”
“저런 큰 경기에서 최선을 다했잖아요.”
아이들의 대답은 어른스러웠습니다. 우리가 가져왔던 음료수 병이며 쓰레기를 줍고 주변의 것들도 아이들이 먼저 주우니 그냥 가려던 사람들도 따라서 주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던 현우가 축구를 열심히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축구부였던 현우는 공을 꽤 잘 찼습니다.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을 하기는 했지만 보육원에서의 통학거리가 너무 멀고 지원해줄 가족이 없다보니 현우는 제대로 축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길거리 응원이 자극이 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안정환 선수도 어렸을 때 운동하기 힘든 형편이었지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꼭 해낼거에요. 제가 월드컵에 나갈 때 꼭 오늘처럼 응원해주세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밤새 응원하고 운전하는데도 피곤하지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하룻밤의 여흥이 될 수도 있는 길거리 응원인데, 보육원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현우처럼 어린나이에 자신의 꿈을 접으려하는 아이들에게 많은 따뜻한 손길과 관심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