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주신다는 선물이 우리에게도 왔다. 아주 작은 생명이 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임신축하한다는 말보다 걱정스러운 말들뿐이었다. 아이를 낳기엔 형편과 상황이 안좋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말들보다 우리 아이이기에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 일이 잘 안되어 금전적인 문제와 성격차이로 부부싸움이 잦아졌고 산부인과의 많은 검사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나마 아이에게 문제가 없다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7개월쯤 되어 산부인과에서 양수양이 좀 적으니 물 많이 먹고 운동량을 줄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큰 문제는 아니니 걱정 말라고 8개월 때도 같은 말 뿐이었다.
그리고 9개월 되었을 때 양수가 없어 아이가 압사 당할 수 있다는 말과 수술을 바로 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말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우리에게 수술비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보기도 하고 연락안하고 살던 친구에게 전화도 해보고 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인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좋은 분(수녀님)을 알게 되어서 부산이라는 낯선 곳으로 가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36주 만에 태어난 아이인데도 1820g이라는 아주 작은 아이!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안아보지도 못하고 작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지내야 했다. 다른 아이보다 작았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씩 커 주어서 감사했다. 그러나 그저 작게 태어나 더딘 거라 생각했는데 늦어도 너무 늦게 자라는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가게 되었다. 검사결과 ‘뇌성마비’ 나에게 먼 단어였는데 내 가슴속에 깊게 박힌 단어이다. 받아들이기엔 엄청난 사실이기에 너무 힘이 들었다.
나의 지인은 입양을 권하기도 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한들 어찌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지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나보다 나은 양부모를 만나 잘 지낼 수도 있겠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찌 보낼 수가 있겠는가? 우리 아이는 우리가 사랑으로 키우면 되는 거지 돈이 있으면 좋겠지만, 장애야 좀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이겨 낼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고 다시 병원에 찾아가 정확하게 설명을 듣고, 뇌 병변 2급을 받았다.
그날부터 장애에 대한 책들을 보며 공부 아닌 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론적으론 이해가 가는데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곳을 찾아 다녀야 하는지 막막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알아 본 곳은 의정부 성모 병원 재활의학과에 물리 치료 겸 작업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 기찬이가 거부가 심해 40분 치료인데 5분 정도도 받지 못했다. 억지로 몇 개월했으나 거부가 심하다며 좀 커서 치료하자 하셨다. 우리 부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인사를 하고 쓸쓸히 나왔다.
그래도 이렇게 포기 할 수 없기에 도움을 청할 곳을 찾았다. 하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물어볼만한 사람도 없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터넷에서 해오름 장애 전담 어린이집을 알게 되었다. 전화 상담 후 바로 찾아갔다.
선생님들의 친절함과 깨끗한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이집에서도 반가이 우리를 맞이해 주셨고 상냥한 설명과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려하는 모습에 너무나 감사했다. 처음으로 우리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이기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상담 후 우리는 당장 양주에서 동두천으로 이사를 했고, 빠른 시일 내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장애인복지관도 빠르게 다닐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밥도 거부 하고 적응을 못하고 면역성이 약해 감기를 달고 지냈지만 그래도 다행히 잘 지내주었다. 며칠후 감기가 너무 오래 걸려 있던 기찬이가 열이 40도가 넘고 많이 칭얼거렸다. 일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허둥지둥 의정부성모 병원 응급실로 갔다. 심한 병이 아니라 중이염으로 인한 열이란다.
응급처치 후 열이 내리길 기다리던 중 우리 기찬이의 반복적으로 몸을 흔드는 버릇이 있는데 침대위에서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속닥거림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기찬이의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엉엉 울었다.
남편은 “이제 이런 일 많이 있을 텐데 벌써부터 이렇게 울면 어떻게 해~”
난 아무런 말도 못했다. 우리 기찬이가 나중에라도 이런 시선들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슬펐다. 그리고 나 또한 장애인 들을 어떻게 지나쳤는가? 혹시 나 또한 이렇게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마음속으로 반성도 하고 엄마로써 더욱더 강해져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어느덧 1년, 2년... 어린이집과 복지관을 다니고 있다. 험난한 산을 오르듯 차근차근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누워만 있었고, 앉아만 있었고, 설수만 있던 기찬이가 이젠 조금 흔들흔들 거리지만,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젖병으로만 먹던 기찬이가 이제는 밥도 먹는다.
아직은 깡마른 체구와 눈 맞춤이 길지 않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고 혼자서 밥을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씩 커가고 조금씩 눈을 맞추어주고 가끔씩 엄마를 꽉 안아주고, 밥 또한 스스로 먹지는 못하지만 한 그릇 뚝딱 할 정도로 잘 먹는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조금씩 이라도 변화가 있다는 게 어딘가? 포기라는 단어를 안 쓸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처음엔 치료하면 바로 걸을 줄 알았고 바로 엄마 아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안다. 꾸준히 관심과 사랑을 갖고 치료하면 조금씩 발전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과 가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족인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젠가 기찬이가 엄마라 부르며 안길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