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31일 저는 친구 때문에 지게 된 빚 삼천만원 때문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가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청소년 시절에 방황을 한다지만 저는 30살에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작정 가출을 하였습니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돈이 다 떨어져 3개월간 구미역에서 노숙을 하게 되고 거기서 수돗물을 밥 대신 빨아 먹으며 눈물로 겨울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3개월 만에 구미시 도량동 한 주유소에 취직을 하고 먹어본 밥맛, 그것은 밥이 아니라 생명의 맛이었습니다. 수개월간 잊고 살았던 밥맛, 노동을 한 자만이 먹어본 맛, 쌀밥이었죠.
그렇게 지내다가 일년 후 집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긴 방황의 끝에 부모님께 사죄도 드리고 부모님 도움으로 빚도 갚게 되어 저는 신용 불량자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있는 한 제지업체에 취직을 했습니다.
어느날 그곳에서 아는 사람이 ‘너는 돈도 없고 집도 없으니 외국인과 결혼하는 게 어떻겠니?’ 하는 한마디에 나의 처지를 생각 해 보게 되었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외국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돈 많은 외국인 만나 집도 생기고 생활도 나아졌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솔직한 마음으론 그랬었죠. 그러나 소개를 받게 된 분은 일본인 여성인 “에노키 아케미”씨로, 오사카에 살고 있으며 집이 가난하고, 부모님도 젊었을 때 산에서 나무 벌목하는 사업을 하시다가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보시지 못하고 나무에 깔려 고생하신 분이었습니다.
제 고향은 충남 천안시로, 제가 자란 곳이 병천 아우내 장터입니다. 바로 유관순 열사의 고향이며 삼일 만세운동으로 유명한 곳이죠. 그런 연유로 일본사람이라서 결심이 쉽지 않았고 집이 가난 하다는 말에도 고민이 많았으나 인연이 되려고 하였던지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에노키 아케미씨와 저는 우리 가족만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대구시 현풍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과 가족, 회사 동료들은 일본사람과 결혼하면 아이가 놀림감이 된다고 반대 하기도 했습니다.
“쪽발이란 말을 네 자식이 감당 할 수 있겠어?”
그때는 다문화란 단어도 아직 없을 때라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2세를 위해서 결심했죠.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본도 한문을 쓰니까 2세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가 배우기 쉽잖아” 나는 이 말에 공감해 결혼을 결심하여 결혼하고 직장이 있는 이곳 현풍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봉고차를 빌려 이불과 가재도구와 쌀 등 당장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주고 가시면서 전봇대마다 “박상헌네 집 가는 길”하며 매직으로 써넣고 가셨습니다. 일본에서 온 아내 에노키 아케미씨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저는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하루 만에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아내에게 손짓으로 배를 가리키며 아프다며 수술하는 제스처를 하였더니 알겠다며 수건으로 배를 따뜻하게 해주고 병원으로 나를 데리고 가 맹장수술을 하였죠. 아! 이게 부부구나? 나는 병원에 누워서 그간 가출과 그 외 어려웠던 일로 인한 외로움, 서러움을 극복하고 이제 하나가 아니라 둘이구나 실감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고통이었죠. 수술하고 일반 병실에 옮겼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 아케미씨를 불렀습니다.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화장실로 데려가야 하는데 너무 천천히 당기길래 “빨리땅겨”했더니 멈칫하였습니다.
내가 “땅겨” 하였더니 놀라서 그만 나를 잡던 손을 그대로 놓아 버렸습니다. 나의 통증은 심하였고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옆의 할머니 환자께서 당신도 아프신데 저를 일으켰습니다. 그제서야 부인은 알았다며 “미안해” 하였습니다. “아! 아플 때 말이 안 통하니 이런 고통이 있구나?”
그렇게 서먹함과 아픔 속에서 시작한 외국인과의 신혼 생활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우선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생활, 습관차이, 음식과 수준 차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설날, 우리는 천안에 있는 시댁 저의고향에 갔습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한두 시간이 지났는데 부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저는 깜짝 놀라 여기저기 찾고 있는데 저쪽에서 부인이 걸어왔습니다.
반가워서 달려가 “어디 갔다 와” 그랬더니 “멘스종이 사러요” 라고 대답해서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시골에 슈퍼가 없거든요.
“슈퍼가 있었는데 도시로 젊은 사람이 모두 떠나 슈퍼에서 사먹을 사람이 없어 있던 슈퍼가 문을 닫아 버렸어요.” 하고 설명하자 그제서야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내 불찰이구나. 시골집에 오기 전에 시골 상황을 설명하고 준비 시킬 것을?’
그러고 나서 시골에서는 차례를 지내지 않아 집에 머물다가 서울 큰집으로 명절을 지내러 갔습니다.
모두 잘 왔다며 반가워하는데 유독 한분만 “큰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남양 군도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서 고생했는데 일본사람하고 결혼을 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큰아버지가 끌려가서 고생을 하신 것을 알기는 하지만 면전에 대고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부인에게는 설명을 자세히 하지는 않고 그냥 명절을 지내고 대구로 왔습니다.
일 년 후, 나는 충남 아산 소재의 단무지 공장에 직장을 구하여 이사를 왔습니다. 아케미씨가 임신을 하였는데 출산하면 이사도 쉽지 않고 배도 더 부르기 전에 이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 후 IMF가 오고 직장에서 월급에 대한 갈등이 많은 등 우리 부부에게도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더욱이 아산, 천안은 충절의 고장이라 일본 사람에 대한 적대심도 많았고 저 또한 결혼하면 괜찮을 것 같던 일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3.1절, 광복절, 2002년 월드컵, 독도사태,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 일본과의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을 때에는 우리 집도 갈등이 생겼습니다. 언론을 보고 일본이 잘못하면 저는 어김없이 부인에게 화풀이하였고 부인은 그날은 밖에 가는 것도 삼가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일부 일본정치인들의 잘못을 부인에게 화풀이한 것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제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한일문제만 대두되면 자동입니다. 부부 싸움이죠. 그러면 초등학생이 된 딸은 “엄마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며 엄마를 두둔 합니다. 그러던 딸이 학교에서 예전에 tv에서드라마로 방영했던 명성황후를 보고 엄마에게 “일본 나빠”하며 핏대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날에는 우리 가정은 평화롭죠.
비록 제가 주식 등에 손을 대고해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회사를 그만두고 식당을 차려 다시 말아먹고 실내포장마차도 말아먹는 등 빚이 일억이 넘게되어 회사경비에 세탁소점원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아내는 내 곁을
지키며 나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시부모님께는 일주일에 한번 씩 찾아가서 발마사지를 한 시간여씩 해드리는 착한 며느리이며 일본이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천안, 아산지역 일본부인들과 모임을 결성해 천안시 노인회관을 찾아 15년째 회관청소와 노인분들 발마사지를 해드립니다. 비록 일본이 우리 역사 앞에 많은 잘못을 했지만, 한국에 시집와서 사는 일본 사람들은 한국이 잘되기를 바라고 남편,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보통 여성이요, 한국 아줌마입니다.
이제 단일 민족 국가에서 다문화로 접어들어 백만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일원이 되었다는 데에는 국민과 조상님들께 면목이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한국의 결혼 풍습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므로 참고 인내해서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한 이불속에 두 나라가 공존 하지만 마음만은 양국이 잘되고 우리나라가 잘되고 우리 가족이 잘된다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한일 양국이 악화 일로를 걸을 때 일본 대사관에서 “일본 대국민 신변보호 지침서”라는 공문 같은 것은 다시는 받는 일이 없도록 한일 양국이 잘됐으면 합니다.
더불어 백만 다문화 시대에 외국인과 사는 것이 ‘우물에서 숭늉 찾기’처럼 쉬워 보이는지는 몰라도 사는 사람은 인내와 인내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중국, 베트남 등 동남아의 사기성 결혼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들도 하나의 인격체요. 한국을 제2의 고국으로 생각하고 한국에 뼈를 묻으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말이 더디고 풍습이 다르다고 경시와 멸시하지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