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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
  • [다문화수기 | 201006 | 김윤정님]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
저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베트남 통ㆍ번역사로 일하고 있는 김윤정입니다. 베트남 이름은 ‘구엔민호아’인데 2006년 국적을 취득하면서 이름도 한국이름으로 바꿨습니다. 한국에 온지도 벌써 7년 6개월이 지났어요. 7년 반의 제 한국생활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처음 베트남에서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날씨가 참 많이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 와서 처음 식구들을 만났을 때 시할머니와 시부모님, 시동생, 시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도 힘들었지만 많은 시댁 식구들이 조금 부담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시할머니, 시부모님을 모시고 남편, 시동생, 시누이와의 한국생활을 시작했어요. 제가 한국에 처음 왔었던 7년 전엔 정읍시에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롭기도 했지만, 가장 어려웠던 건 역시 한국말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곳도 없어서 저는 어머니, 남편의 도움으로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며 한국생활에 적응하려 하였지만 고향 생각도 참 많이 났어요. 한국에 온지 3개월 만에 임신을 하고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해 라면이나 남편이 사다주는 베트남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음식을 만들면 시부모님, 남편은 제가 해준 음식을 잘 먹었어요.
오히려 시동생의 식성이 까다로워서 입맛에 맞게
음식을 만드는 것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시댁에 적응해 가는 도중 한국에 온지 6개월 만에 시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한국에 와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저의 첫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들은 태어나마자 큰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폐도 안 좋고 심장도 안 좋았거든요. 저도 수술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아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마음만 아팠습니다. 제가 열흘 만에 퇴원해 병원에 있는 아들을 보았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그때 친정엄마가 많이 생각나고 많이 보고 싶었어요. 시어머니께서 따뜻하게 대해 주셨지만 그럴수록 친정 엄마가 더 보고 싶었어요. 아들은 한 달가량을 입원한 뒤 건강하게 퇴원하여 제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들을 볼 때마다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에 전 참 행복해요.
그렇게 아이엄마가 되고나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언어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언어문제로 힘들어할 때 정읍시에서 한글과 컴퓨터 교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면사무소에 신청하여 한글과 컴퓨터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걱정이던 언어문제도 교육을 받으며 해결해 가던 중 다시 둘째 아들을 가졌습니다. 그때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그래서 시부모님의 배려로 4개월 동안 베트남 친정집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이제 가족들에게도 저에게도 좋은 일만 생기려나 보다 하고 안심하고 지낼 무렵 갑자기 시아버지께서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하셔야만 했고 2년 반 동안 병원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오셔서도 몸이 불편해 아무 일도 못하시고 집에만 계셨습니다. 그 무렵 시동생이 결혼하면서 식구가 한 명 더 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동서가 생긴 셈이지요. 시아버지의 병 수발과 같은 여자이지만 너무나 다른 동서와의 차이 때문에 몸도 마음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항상 힘이 되어주는 두 아들과 남편이 있다는 큰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있을 무렵 저에게 또 다른 도전이 주어졌습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이주여성에게 운전면허를 따게 해주었어요. 남편과 센터의 지원으로 한국어로 필기시험을 보고 당당하게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저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함께 하면 좋은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제게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또 찾아왔어요. 센터에서 통ㆍ번역 서비스 하는 일을 추천해주었습니다. 저는 광주에서 시험보고 합격하여 서울에서 일주일동안 교육을 받고 ‘정읍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베트남 통ㆍ번역 요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두렵기도 하고, 한국말이 서툴고, 일의 순서를 몰라 항상 긴장 속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통ㆍ번역사로 일하면서 저와 같은 이주여성들과 이야기 해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업체들이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또 각자 집안의 고부갈등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점과 베트남하고의 문화차이들을 자세히 설명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편입장에서 이주여성 입장에서 잘 설명해주고 조언해 주는 게 제 임무라는 걸 통ㆍ번역을 하면서 참 많이 느낍니다. 그분들에게는 센터에 제가 있다는 것만으로 작은 안심을 할 수 있고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큰 어려움이 없이 한국에서 지냈다면 아마 지금 하는 통ㆍ번역사 일이 어렵기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젠 어떤 일에도 힘이 들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제게는 든든한 가족과 많은 친척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 일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으로 다가왔던 가족과 친척들은 많은 사람 수 만큼 제게 사랑과 관심을 준다는 점에서 행복하답니다. 저의 7년 반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알게 된 것 하나는 어려움은 피한다고 극복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려움을 잘 견디고 이겨내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인생의 법칙을 이제는 알아요. 다른 이주여성들도 힘차게 하루하루 웃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분명 좋은 일이 생긴다는 법칙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