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고모 댁에 새로운 가족이 생긴 지는 이제 여섯달이 지나간다. 사촌오빠께서 서른일곱이 되어 늦은 결혼을 하게되었기 때문이다. 새 언니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놀라고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2009년 어느 가을, 할머니 생신을 맞아 객지에 있던 친척들이 모두 모이던 날, 늦깎이 새 신랑이 된 사촌오빠와 어여쁜 새언니가 찾아오셨다.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새 언니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새 언니는 낯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촌오빠분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다정하게 마주 잡은 손이 정말 예쁘고 보기 좋았다. 또 한편으론 얼마나 낯설고 고향이 그리울까, 초조한 눈빛에서 불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새 언니는 수줍음많은 새 신부의 모습을 뒤로하고, 생선 요리를 하시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올 때 정성스레 가지고 온 생선이라고 고모가 덧붙여 말씀해주셨다.
여든을 바라보시는 우리 할머니를 위해서 직접 생선 구이를 하겠다고 하자, 모두가 부엌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름 모를 생선인지라 조금은 미심쩍었지만 지글 지글 타들어 가는 구수한 생선향기와 하얗게 서린 연기 속에서 모두가 새 언니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새 언니는 낯선 곳이지만 할머니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생선을 직접 정성스레 익혀 나오셨다. 할머니는 별미를 드시는 듯 젓가락으로 살점을 곱게 발라 드셨다. 베트남에서 온 생선향기가 집안 가득 감돌았다.
사촌오빠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 집안 가업인 농사일을 이어받아 농사일을 한 사람이었다. 서른이 되었을 때부터 고모는 '장가가야지', '결혼할 사람 데리고 와야지' 라는 말들을 수시로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소위 경제력 있고, 세상에서 인정해주는 직업을 갖지 못한 것이 흠이라 받아들여지는 문화 속에서 사촌오빠는 맞선에서 좌절을 겪으셨다.
그리고 2009년, 평생을 함께할 인연을 먼 나라 베트남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또한 2010년 1월, 새 언니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고모의 수화기 너머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문화 가정이 탄생한 것이다. 세상모르고 새 언니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기는 얼마나 귀여울까, 상상이 잘 안되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베트남 사람에게 우월감을 갖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편견과 수많은 선입견속에서도 당차고 올바르게 자라나길 바라는 기대 반 걱정 반이 들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새하얀 얼굴에 유창한 영어를 쓰는 미국인도 아니고, 새침한 외모에 소위 경제력 있다고 인정받은 일본인도 아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작은 나라이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베트남 언니의 마음만큼은 최상급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모가 일하러 나가는 날엔 매일 아침 7시마다 밖으로 나와 서툰 한국말로 '잘 다녀오세요.' 라는 인사를 따뜻하게 건네주며, 시아버지인 고모부에게 쌀밥과 맛있는 반찬을 푸짐하게 손수 차려드린다는 고모의 며느리 자랑을 자주 들었다. 사실 고모네 가정은 사촌오빠의 결혼이 지연되면서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어둑어둑 했었는데, 새 언니 덕분에 이제는 작은 천국이 되었다. 샘물처럼 솟아나는 새 언니를 향한 고모 식구들의 사랑과 새 언니의 따뜻한 심성이 한 가정을
이루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성품의 사람이 없듯이 온전한 가정 또한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결혼해도 싸울 일이 많을 텐데, 국적 다른 사람끼리 만나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보통 부부보다 더 많은 인내와 변함없는 사랑이 필요할 것이다. 훗날 아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