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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회상의 힘
  • [사회복지종사자수기 | 201007 | 우정아님] 내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회상의 힘
내게 있어 사회복지사라는 것은 마치 미리부터 예정되었던 운명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초등학교를 거슬러 중고등학교까지 사회복지라는 단어를 알기 전까지 막연하게나마 내게 어떤 좋아하는 일로 늘 자리잡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동아리 활동도 장애인관련 분야에서 일하면서 내가 모르던 것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계속 하겠다는 목표를 뒤로 하고 장애인복지를 한답시고 장애인 관련 기관에서
나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곳에서는 장애인 정책분야에 대한 일들을 주로 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을 취재하거나 그 사실을 알리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러면서 뭔가 좀 허전하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던 차에 영구임대아파트에 위치한 복지관에서 장애인복지를 담당하는 신규사회복지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일들을 배우면서 사회복지현장에서 클라이언트라고 명명되는 나의 첫 고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게 된 어여쁜 소녀였다. 민희(가명)는 아파트 9층에서 추락하여 하반신이 마비되어 1여년을 집밖으로 외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추락당시 기억이 없었고, 가족 모두 민희를 돌보아 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언니는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일했고, 두 남동생은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전국 방방곳곳을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마저 식당일을 밤늦게까지 하고 있는 터라 민희의 어려운 상황에 도움을 주기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처음 민희를 만났을 때 민희는 배변처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발가락을 움직이고 감각이 살아있음에 희망을 가졌다. 우리는 당장 물리치료와 배변훈련에 대한 부분에 대해 함께 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민희를 우선 장애인복지관으로 가서 촉탁의에게 먼저 장애진단을 받고 물리치료에 대한 진료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최종적으로 지체장애 진단을 받고, 아직 하반신의 감각이 살아있어 빠른 시일 내에 물리치료를 받기로 하였다. 그날 민희는 자신의 두 다리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라 한참동안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울음에 나까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잠시 우리에게는 더 큰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 2~3회 동안 병원과 장애인복지관으로 민희를 데려다 주는 일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급한 맘에 당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엄길청의 손에 잡히는 경제’라는 프로그램에 이 사연을 올리고 민희를 도와줄 지원자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세상은 아직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우리는 자신감을 얻었다. 어느 중소기업 사장님, 슈퍼 사장님 등 여러 사람들이 신청을 하였고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을 면밀히 선별하여서 민희는 물리치료와 병원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세월이 2여년이 지나 민희는 배변훈련을 멋지게 해내고, 혼자서 휠체어 이동이 가능한 성숙한 아가씨로 성장하였다. 민희는 무엇보다도 집에서 자립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마침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직업훈련학교가 있어 일단 그곳에서 1년간 훈련을 받은 후 취직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이 일정을 일사천리로 진행하였다. 원서를 내고 면접과 테스트를 거치는 과정을 마쳤다. 합격하여 입학이 결정되고 난 후의 들뜬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직업훈련학교는 경기도 일산에 있었기 때문에 민희는 부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빠르게 새로운 생활을 꿈꾸었다. 일산에 가기까지도 여러분의 도움을 받았다.
김포공항에서 일산까지의 이동은 서울 모 소방서의 도움을 받아서 갔다. 나는 나대로 맘이 들떠서 내 아이 입학시키는 것 마냥 신나 있었다. 그러고 몇 달 동안 간간히 연락을 하였고, 드디어 서울의 귀금속업체에 취직을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인다고 먹으러 오라는 둥 민희는 사회생활에 대한 즐거움에 목소리는 한껏 밝았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내가 그동안 작성했던 사회복지기록물(사례관리 및 서비스 제공서류) 등을 정리하여 민희가 거주하고 있던 관할구역의 S장애인복지관에 공식적으로 민희에 대한 의뢰를 하였다. 나는 나대로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 미친 채(?) 일하느라 소식이 뜸했었다.
어느날 장애인관련 동영상을 관람하다가 그 동영상 속에서 민희를 발견하였다. 민희는 한 야학에서 진행되었던 장애인이동권확보를 위한 시위에 참가하여 그 곳의 동료들과 함께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걱정보다는 민희가 자신의 삶에 당당하게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하였다. 민희가 가고자 하는 삶에 이제는 안심하고 박수를 보내주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고, 며느리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시댁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구포역 저 멀리 아련히 아는 얼굴이 내 눈으로 들어왔다. 바로 민희였다. 여전히 예쁘고 밝은 모습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휠체어를 밀고 오는 민희와 나는 반가운 해후를 하였다. 민희는 날 보자마자 자기 자랑부터 하였다. “선생님 제 남편이에요, 제가 너무 좋아서 남편에게 먼저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했어요. 정말 잘생겼죠?
저는 야학에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애니메이션을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민희는 몇 년 동안의 헤어짐을 그렇게 단 몇 분 동안의 수다로 설명하였다. 나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의 첫 클라이언트라 맘이 늘 애잔하였던 그녀 아니 소녀였던 민희가 내 앞에서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의 원대한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오지랖 넓게 역사 안에서 박수를 치며 우리 남편과 아이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고 각 자의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 헤어졌다. 민희는 모를 것이다. 내가 저를 얼마나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지금까지 민희가 내게 줬던 혹은 내가 사회복지사로서 힘들 때 마다 나를 북돋아줬던 힘이 민희에게 있었음을.. 지금도 민희는 삶을 사랑하며 씩씩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가끔은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나와 같은 하늘 아래 또 다른 누군가에게 웃음을 던져 또 행복을 추억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