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7년 교회를 통해서 인연이 된 한국 사람과 결혼을 했다. 처음에 결혼을 반대하시고 “부녀의 인연을 끊겠다.” 고 하신 아버지. 나의 결혼문제로 인해 걱정 때문에 퍽 여윈 엄마. 두 분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입어야 했던 웨딩드레스. 기뻐해야 할 날이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울었다. 부모가 걱정하시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왜 낳아주시고 고생하면서 키워주신 부모님을.. 나를 깊이 사랑해주신 부모님을 버리고 한국에 시집왔는지? 남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늘이 맺어주신 인연이니까. 내 인생의 최고 파트너는 이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그 사람 한 사람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 증거로 그렇게 반대하시던 아빠도 엄마도, 정 많고 예의바른 한국사위를 보고 좋아하시고 안심하셨고, 우리를 축복해주시지 않았는가.
9년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한국에서 우리 피로연을 열었다.
“딸 덕분에 한 번도 타보지 못 했던 비행기도 타고, 해외여행도 할 수 있었어!”
친정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평상시에는 자랑을 안 하시는 분이 친척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니실 정도였다.
한국 과 일본의 문화차이, 그것을 처음으로 피부로 느꼈던 것은, 남편과 만나서 처음 맞이하는 나의 생일 때였다. 남편이 준 선물꾸러미를 앞에 두고, 나의 가슴은 기대로 들썩들썩. 풀어보니까 너무 놀라서 얼른 포장지로 덮었다. 얼굴은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두근.. 무엇이 들어있었는가 하면 꽃 모양의 예쁜 팬티 와 노 슬리브의 란제리세트. 한국에서는 사랑하는 여성에게 흔히 주는 선물이지만, 일본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팬티를 준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일 그런 선물을 보면 ‘그 사람은 호색 적이고 징그러운 생각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 틀림없어.’
여성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의심했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東京지방의 일본사람은 대부분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상대방에게 말로 전해주지 못 한다. 아무리 누가 말하라고 그래도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이 상처 받을까봐..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고,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비틀어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문제가 커진다.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나 같은 경우, 한국의 풍습을 조금 아는 선배언니한테 의견을 들어봤다. 그제서야 그 선물의 의미와 가치를, 그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젊은 시절에 일본어를 배우러 東京에 가있을 때, 장래 아내가 될 여성에게 줄려고 사서
나와 만날 때까지 실로 5년 동안이나 잘 간수해 두었던 정말 귀한 멋진 선물이었다. 그 정성에 감동을 받았고 나의 보물 제 1호가 되었다. 그 일은 ‘남편과 나, 둘 다 잘못이 없어도, 문화차이 때문에 이렇게 오해가 생기고 관계가 비틀어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두 개의 문화 양쪽을 다 아는 사람만이 풀 수 있는 문제니까,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국제결혼을 한 선배언니에게 상담을 했다. 그렇게 해서 고향 언니지만 우리는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낸다.
큰애가 생후 4개월 때의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만 대변을 볼 수 있었다. 아이 네 명을 둔 손위동서가 그것을 듣고 조언을 해주셨다.
“배변회수가 너무 적다. 젖이 모자라지 않은지 영양보충을 위해 이유식을 시작하면 어때?”
애기가 배고프다고 자꾸 찡찡거리거나 울지 않아서, 모유부족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곧 분유회사에서 나온 이유식을 먹여봤다. 그런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지 않는가..
너무 놀라서 소아과에 데리고 갔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우유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이유식은 생후 6개월 넘어서 시작하시고, 그때 분유회사의 이유식을 쓰지 말고 미음부터 먹이세요. 배변이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어도, 그것이 이 아이의 습관이니까 문제없을 거예요”
때마침 우리 집에 오신 시어머니는 애기의 배를 만지면서 “금방 젖을 먹었는데도 배가 땡땡하지 않지? 젖이 모자라서 그래.... 백설기를 물에 넣고 으깨어 저으면서 끓인 다음, 식혀서 먹이면 영양도 있고 좋데이. 옛날에 젖이 안 나올 때, 그렇게 해서 애들을 키웠단다.” 애기는 배고픈 소리를 안 했지만 체중에 그 답이 나왔다. 전문의사의 말씀 보다 경험이 많은 시어머니나 손위동서의 말씀이 맞았던 것이다. 미음은 맛이 없어서 그런지 잘 안 먹었다.
시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대로 백설기를 끓여서 먹여보니까 조금씩 먹게 되었다. 덕분에 대변을 일주일에 2~3번 볼 수 있게 되었고 알레르기 걱정도 없이 쑥 쑥 자랐다. 그 일로 배불리 먹을 것이 없던 시대의 산모들의 고생도 좀 알 수 있었고, 어른들의 지혜가 대단함을 실감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핵가족이 늘어났지만, 한국 특히 경북지방에서는 유교정신이 살아있고, 모시고 사는 것을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인식이 아직 남아있다. 일본에도 그런 아름다운 정신과 인식을 다시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8년 전에 그렇게 백설기를 먹고 자랐던 큰애가 지금 나에게 희망을 준다.
지난봄의 일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모두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아기씨” 이야기를 건넸다.
“나도 알아. 아빠 몸속에 있는 많은 아기씨가 엄마 몸속에 들어가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제일 먼저 도착하고 이긴 아기씨가 아기로 자란데..”
“그럼 승목이는 이겼어?”
“이겼어!”
밝은 미소를 짓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엄마도 이겼네!”
나의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나는 그 말에 위로받고 가슴이 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