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에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늘 다짐하던 어린 시절...그런 아이가 그 꿈을 잊어가고 대학에 가지 않겠다며 반항하던 딸 때문에 우리 부모님께서는 사회복지학과에 대신 원서를 쓰셨다. 1년의 다른 학부전공과 1년의 재수 끝의 늦은 입학이라 집과 학교밖에는 모르고 지내던 차에 교회언니의 소개로 외국계 기획사에 스텝을 하게 되었다. 전공과는 상관없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곳은 사회복지 관련 기획이 많았던 곳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대로 음악 기획사 3년을 무보수로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미국 1.5세들이 많은 곳에서 문화차이를 겪던 나는 오히려 차이를 절실히 실감하며 약간의 차별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오기가 생기고 그들에게 한국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에 오빠가 해외로 자원봉사를 갔다 오게 되었다. 같은 건물 영어 선생님과 카자흐스탄에서 분홍빛 연애를 하는 줄을 부모님은 모르시고 “어~얼 머~니~”하고 외국인 색시를 데려 오는 것 아니냐며 너스레를 떠시기도 하셨다.
얼마 후 나에겐 외국에서 유학 온 ‘손님’이 생겼고 어머니의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한국 사람같이 생겼네’ 하며 새언니를 맞았고 그 분은 얼마 후 한 가족이 되었다. 처음에 새언니가 그저 공부하러온 유학생이었을 때는 새언니만큼 나도 어색한 풍경에서 한국문화를 알려주고 싶었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어색함도 잠시 원체 상냥한 새언니 덕에 우리는 한층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새언니가 외국인 동생에서 진짜 가족이 된 순간부터 문제가 생기기시작했다. 선진국으로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알고 명색이 사회복지 전공인 나였지만 나 역시 편견 덩어리 외국인이었다. 새언니를 동생으로 보았을 때 무척이나 자상한 언니였지만 입장이 전도가 되면서 난 못된 시누이로 변해있었다. 모든 집안일은 새언니가 도맡아 했고 때로는 괜한 눈치를 주기도 했다. 한국말을 못하니 답답하다면서 새언니를 무시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오빠는 너는 러시아말 할 줄 아냐며 새언니를 두둔했다. 그러면 그런다고 또 새언니를 미워하곤 하며 새언니를 시샘했다.
왜 새언니는 그 나라에서 살지 우리나라로 시집와서 그러냐며 새언니 가슴에 비수를 꽂기도 했다. 가끔은 애처로운 마음에 선물도 하고 그랬지만 예쁘고 똑똑하기까지 한 새언니를 인정할 수 없었다. 나에겐 그저 그런 세상물정 잘 아는 약싹 빠른 효녀로만 여겨졌다.
엄마에게 나 같으면 외국으로 부모 놔두고 시집오진 않는다며 어린 애 같이 굴며 현대판 신데렐라처럼 말하자면 새언니에게 시누노릇을 톡톡히 해댔다.
그런 나에게 새언니는 손위는 손위라 그런지 오빠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 오빠네 집에 찾아가면 밥을 챙겨주며 어른스레 따뜻하게 맞아주곤 했다. 그런 새언니가 외국 생활 하면서 많이 힘들고 외롭겠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도 들었고 잘해 주겠단 마음도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새언니는 조카 준용이를 낳았고 처음엔 준용이까지 낯설어 하던 내가 점점 준용이가 애틋한 마음에 눈이 삼삼히 박혔다.
준용이가 태어난 지 1년이 다 될 무렵 아쉽게도 오빤 해외근무를 하게 되면서 카작 이웃나라에서 2년 정도 살게 되었다. 입장이 180°바뀌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오빠가 외국인이 되고 새언니가 거의 그 나라 국민이 되어 더욱 친정과 가까워 진 것이다.
그렇게 입장이 바뀌자 오히려 새 언니는 오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오히려 오빠에게 더욱더 힘이 되었다. 현지 물정을 잘 아니 말이다.
'이런 일도 다 있네.' 하며 난 새언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오빠네 식구를 1년 후에 만났을 땐 더욱 달라진 모습에 반갑기도 하고 엉엉 우는 내 모습에 오빠도 그런 공감하는지. 옷을 사 입으라면서 부모님 통해 용돈을 전해주고 갔다. 입장은 바뀔 수 있구나. 왜 새언니가 한국에 있을 때 그토록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그 사람 입장이 되어봐야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언니 미안~우리는 모두 같은 입장이다. 이제 내가 새언니가 그랬듯 나도 따뜻이 맞아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