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막내아들이 30대 후반이 되어도 결혼을 하지 않아서 저는 크게 걱정이었어요.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왜 결혼을 못할까, 동남아시아쪽으로 해외 출장이 많아서 사람을 사귈 시간이 없나, 별 생각을 다했지요.
그러다 막내아들이 서른 아홉 되던 해에 결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겠다니까 저희 부부는 크게 놀라서 말렸지만, 막내는 부모님 모시고 살고 싶었다면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아가씨가 필리핀 아가씨였습니다. 필리핀쪽으로 1년 넘게 파견나가 있었는데 그때 사귀었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반대했지만, 필리핀에 있으면서 저희 아들과 결혼하려고 한국어까지 배우고 또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며느리의 말에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답니다.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나오고, 서울서 직장생활까지 하던 막내 아들인데, 필리핀 아가씨와 결혼하고 농사지으러 시골로 내려온 것이 무척이나 속상했지요. 예전엔 동네 사람들에게 막내 자랑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수군거리면서 흉을 보는 것 같고, 비웃는 것도 같았지요. 이게 다 며느리 라냐때문인 것 같아서 처음엔 며느리를 미워했습니다.
결혼 후에 아이를 갖고, 배가 불러오면서도 서툴지만 한국의 살림살이를 배우려고 애쓰는 며느리를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친척하나 아는 사람 하나없이, 우리 아들만 믿고 온 며느리.
임신을 했는데도 돌봐줄 친정엄마나 친정 동생 하나 없는 며느리인데 내가 친정어머니가 되어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가도, 이웃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보면 또 며느리가 미워졌어요.
출산일이 다가오고, 11시간 진통 끝에 첫째 손자 민후를 출산한 며느리가 “어머니, 아기 아빠 닮았죠? 저 안닮았죠?” 하고 물을 때에는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모질게 굴었으면, 아이를 낳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기 전에 누구 닮았냐고 물어볼까?
동네 사람들 시선에만 신경쓰고 정작 우리 며느리에겐 신경을 쓰지 못했구나. 건강한 손자를 낳아준 라냐에게 고맙고, 또 그동안 잘 대해주지 못한게 미안했습니다.
“누굴 닮으면 어때, 라냐 닮아도 이쁘고, 애비 닮아도 이쁘고 다 이뻐. 다...”
저는 라냐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라냐도 제 마음을 알았는지 함께 울었지요.
맏딸이나 큰며느리가 해산을 했을 때보다, 막내며느리 라냐에게 더 정성을 쏟아서 산후조리를 도왔어요. 그동안 며느리에게 미안했던 것을 그렇게라도 보충하고 싶었거든요.
필리핀식 산후조리는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식으로 산후조리를 한 후에 삼칠일이 지나서 걸어두었던 금줄을 걷었습니다. 라냐가 옆에서 “어머니 고맙습니다.”하고 말하는데 저야말로 라냐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냥 꼭 안아주었어요.
첫째 손자가 태어난 뒤에 며느리와 예전에 있었던 벽같은게 없어졌답니다. 같이 수다도 떨고, 더운 날엔 필리핀식으로 달달한 커피도 같이 마시고 어느새 딸처럼 느껴졌어요.
하루는 TV를 보는데 서울 혜화동 성당 근처에서 필리핀 시장이 열리는 것이 나왔어요. 라냐가 저랑 함께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왜 신랑이랑 가지 나랑 가냐고 했더니 필리핀에 있을 때는 친정엄마랑 자주 시장에 갔다고 하네요.
“그래, 그럼 알아보고 당장이라도 가자.”하고는 알아보니 일요일 오후에 열린다고 해서 며느리와 다녀왔습니다.
필리핀 시장에서 며느리는 발룻이라는 오리알을 샀어요. 아기 갖고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면서 “어머니도 드셔보세요”하는데 오리가 부화하기 전에 모습이 그대로 있어서 저는 깜짝 놀랐어요. 며느리는 그런 저를 보면서 재밌어 했답니다.
나중에 며느리가 둘째 민환이를 가졌을때는 제가 일요일에 혜화동에 가서 라냐를 위해서 발룻을 여러 번 사다 주었어요.
그 뒤로 한 달에 한 두 번은 며느리랑 서울 혜화동으로 필리핀 시장에 갑니다. 라냐와 함께 혜화동에 가려고 기차역에 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다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아니라 딸하고 친정어머니 같다며 부러워합니다. 저는 “그건 다 라냐가 착해서 그런거라우. 세상에 이런 며느리 없다우.”하고는 자랑합니다.
제가 우리 며느리 라냐를 예뻐하고 당당해 하니 뒤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런게 없어졌지요. 오히려 우리 고부사이를 친딸보다 더 가깝다며 부러워합니다.
요즘은 농사철이라 일이 많아서 혜화동에 다녀온지 꽤 되었는데, 이번 주말엔 라냐와 함께 혜화동 필리핀 시장에 다녀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