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친정 부모님들의 모진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제주에 시집온 중국 결혼이민자입니다.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6년 동안 근무하다가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일본유학을 선택하여 5년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지금 남편을 만나 한국에 정착한지도 어느덧 4년이 가까워오네요. 재혼인 남편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처음 집에 들어설 때 첫 인상이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고 특히 사춘기인 큰 딸은 내가 말을 해도 들었는지 말았는지 대답이 없었고
두 딸은 자기 방에 들어가면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와 눈길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우리 둘의 자식을 하루 빨리 원했고 나는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낳으면 두 딸들과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임신을 미루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두 딸들과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참 고민이었습니다. 선물공세도 해보았고 용돈도 아빠보다 더 줘보았고 깜짝 이벤트도 해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번엔 애들의 친구들을 끌어보기 작전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전에는 애들 친구들이 오면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지만 이번엔 중국요리와 간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간단한 중국어와 일본어 대화를 함으로써 친구들 앞에서 중국 새 엄마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또 애들의 관심분야인 컴퓨터에 도전해 워드프로세서2급, 컴퓨터활용 엑셀2급자격증을 취득하여 애들과의 눈높이를 같게 하려는 꾸준한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글짓기 공모전에도 부지런히 도전하고 또 제민일보 도민기자로 활약하며 애들의 인정을 받을 그날을 위해 분투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끝내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2년이 지난 나의 생일날, 두 딸이 정성껏 쓴 편지를 떨리는 손으로 받고 읽는 순간 눈물이 울컥 치솟았습니다. “엄마, 생일 축하해!” 처음으로 듣는 엄마 그 이름이었습니다.
애들의 인정을 받고나니 내 나이 37살이 되었습니다. 워낙 아들을 좋아하는 시댁이라 손자를 바라는 눈치는 알았지만 인제는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끝내 2008년 2월에 임신 2개월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이 진실인지 귀를 꼬집어보기도 하였습니다. 두 딸들에게 조심스레 말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줄이야! 그러면서 자기들은 여동생이 더 좋다면서 태명도 인터넷을 찾으며 “보배”라고 지어주었습니다.
두 딸은 엄마는 고령이라서 조심해야 한다며 서로 집일을 찾아하고 비싼 딸기를 사온다 수박을 사온다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우리 다섯 식구의 앞날을 그리며 환상에 들떠 있던 어느 날, 눈앞에 날벼락이 떨어질 줄이야!
생전 연락이 없던 애들의 친엄마가 어데서 들었는지 전남편이 재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앞에 나타나 두 딸을 데려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떨리던 내 심장,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나의 2년 동안의 피타는 노력으로 얻은 행복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
시댁과 남편과의 상의 끝에 애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는데 나는 또다시 까무러칠 지경으로 놀라운 애들의 말에 큰 타격을 입고 말았습니다. 친엄마를 따라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땅이 돌아가고 나는 연 며칠 동안 물 한모금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충격으로 어렵게 얻은 우리 아이가 유산되고 말았습니다... 친엄마를 따라간 무정한 두 딸과 이 험악한 세상에 왔다가 조용히 간 작은 생명을 생각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한 친구가 병문안 오면서 선물로 두고 간 “시크릿”이란 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시크릿이란 끌어당김의 법칙인데 자신을 위한 생각을 스스로 끌어당기는 행동,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갈 때
그것이 자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끌어당기는 힘,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나와 같이 한국에 시집 온 결혼이민자들의 소통의 어려움과 한국에 온 후 부적응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일을 찾게 되었고 제주다문화가정센터에서 자원봉사로 이들의 손과 발이 되어 통역서비스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파도 혼자서는 병원에 갈 수 없는 결혼이민자들, 임신, 출산해도 옆에서 돌 볼 사람조차 없는 이들을 위해 나의 존재는 이들의 친언니, 친정 엄마였습니다.
1년이 지나니 차츰 마음의 상처도 잊혀지고 남편과 둘이서 큰 집에 적응할 무렵, 두 번째로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기쁘기도 하지만 옛일이 생각나서 이번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아기 지킬 것이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입덧이 막 시작될 어느 날, 큰 딸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우리 다시 새 엄마랑 살면 안 돼?” 헉! 이건 또 웬일인가? 한참동안 할 말을 잃었다가 “엄마한테 시간을 좀 주면 안 될까?”라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인생은 요지경이라더니 정말 그른데 없네요.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남편에게 “여보, 나 애들이랑 다시 함께 살고 싶어!”라고 말했더니 남편은 웃는지 우는지 표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1년 동안의 풍파를 겪으며 두 딸들은 친 엄마보다 새 엄마를 더 인정하고 따르게 되었고 나는 애들의 선택을 다시 한번 존중해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며칠 후 두 딸은 짐을 싸들고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지만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시크릿의 법칙-긍정적인 생각만 하기로 하고 반갑게 두 딸을 끌어안았습니다. 훌쩍 큰 두 딸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잃었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작년 11월 9일, 우리들의 바라고 바라던 셋째가 태어났습니다.
예정일이 열흘 더 지났는데도 나올 생각을 안하더라구요. 끝내는 의사선생님의 말대로 아침 첫 사람으로 수술을 했는데 3.5kg되는 건강하고 예쁜 딸이었습니다. 나이 38세에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서 그런지 기쁨의 눈물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후쯤 되니, 시어머니가 시골에서 급히 달려오시더니 병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노발대발 합니다. 워낙 성격이 급하고 제주도 사투리가 심한 시어머님이신지라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듣지는 못해도 아무튼 엄청 화나 있었습니다.
딸을 낳았다고 저러시는고? 임신 때 딸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알고 보니 수술할거면 좋은 날과 시간을 봐서 낳을 것이지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수술했다고 대노해 하셨습니다. 한국은 결혼 할 때 궁합을 보는데 태어난 날짜, 시간을 보고 결혼여부를 결정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이런 문화를 알 리가 없는 나인지라 얼마나 당황하고 섭섭했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남편이 중국은 그런 문화가 없다고 겨우 시어머니를 안정시키고
있는데 학교가 끝나 두 딸들이 들어오더니 자기네들이 바라던 여동생이 태어났다고 얼굴을 만져보기도 하고 안아보기도 하며 부산을 떨었습니다. 시어머니도 세 손녀들을 보며 언제 화냈냐는 듯 흐뭇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큰 딸과 18살 차이가 나는 막둥이, 큰 딸은 나이 있는 엄마 때문에 막둥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부끄러워 체면이 깎인다며 학부모회의 때는 자기가 엄마랍시고 참가한답니다. 애기 낳고 후유증으로 뼈마디마다 아파나는 나 대신에 큰 딸이
가정살림을 도맡아하고 심부름은 둘째 몫입니다.
학교 끝나기 바쁘게 동생 보고 싶어 달려온다는 두 딸들의 말에 가슴이 찡해나기도 합니다. 올 설에는 다섯 식구가 함께 시골에 있는 시댁에 내려갔는데 상차림 장만에 힘든 시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하는 동안 두 딸이 우유를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 갈아주고 제법 재치있게 잘 해서 시아버님의 칭찬에 세뱃돈도 두툼하게 받았네요.
세 딸은 내 생애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어렵게 다시 합쳐진 우리 가족, 비록 내가 낳은 딸은 아니지만 정이란 무섭네요. 인제는 우리 가족 다섯이 하루라도 떨어져서는 못 살 것 같습니다. 새 엄마 노릇 어떻게 할거냐고 결혼 반대하던 친정엄마도 인제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올해 8월에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외손녀를 키워준다고 합니다. 이 행복, 이 순간 고이고이 계속 간직되기를 손꼽아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