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몽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몽골어(국어)를 가르치면서 이후 공부를 더 하여 박싱이히소로꿀 대학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보낸 시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자리를 뒤로 하고 몽골을 떠나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섯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과 아픈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에 한국인과의 결혼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8년전 남편의 따뜻한 마음씨와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자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애꾸눈 임금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옛날 어느 나라에 애꾸눈 임금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나라에 유명한 화가들을 모아서 자신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애꾸눈인 안대를 그리면 서글프고 애꾸눈을 정상인 눈처럼 그리면 거짓된 자신의 초상화라서 화가들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외국에서 이름 모를 화가가 와서는 단번에 임금의 마음에 드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본 다른 화가들도 감탄했지요. 그 외국에서 이름 모를 화가는 임금을 의자에 않게 하고 정상인 눈만 보이도록 옆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일도 있고 좋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즐겁고 행복한 일을 만들면서 살고 싶은 저의 소망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처음 시집와서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생활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저의 꿈이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결혼 신혼부터 시아버지랑 함께 살았고, 저의 남편은 일 때문에 이틀에 한 번씩 집에 오는 생활로 시작했습니다. 시집에 큰 며느리로 들어와서 사는 것이
저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아버님께 저의 친 부모님보다 더 잘해 드리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딸 둘과 중풍(뇌병변장애)으로 고생하시는 시아버지 셋을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또한, 남편의 나이가 있어 회사에 다닐 수 없어 서울에서 사업하는 여동생의 가게 일을
도와주어, 주말부부로 생활하게 된 것은 남편과 저 서로에게 안타까우면서도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시아버님과 사는 것이 때로는 서운하고, 슬픔도 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아버님과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3년 후 저의 친엄마가 돌아가시고, 올해 초에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저와 남편에게는 힘들었습니다.
시아버님은 병원에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입원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지난 세월 두 곳(한국에서는 시아버지, 몽골에서는 친엄마)에서 고생이 많았습니다. 걱정과 고생을 많이 하는 남편을 도와주고 싶지만, 옆에서 보기만 했고 생각만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힘든 시기가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걱정거리는 계속됩니다. 생활비가 모자라서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정이 어려운 일을 당해 걱정이 많고 고생할 때, 이웃의 좋은 사람 덕분에 큰 상(21회 아산상, 다문화가정상)을 작년에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이름을 소개해준 그분에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상을 받게 되어 진짜 눈물도 났고, 며칠동안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꿈 같은 일이 생겨서 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런 저에게 남편이 ‘좋은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뭘 잘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뻐하느냐’ 구요.
‘더욱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열심히 살아야 된다.’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도움을 주신 그분께 미안한 마음이 있고 이 글을 통해 너무너무 감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감이 생겨서 좋은 일을 아주 많이 만들고 따뜻한 마음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아버님 모시는 일도 힘들었지만, 처음 시집와서 한국 음식 배우기가 어려웠을 때 외숙모가 성환에 살아서 저에게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한번 외숙모 집에 놀러 가면 1가지의 음식을 배워 왔습니다. 외숙모가 음식 할 때 잘 지켜보면서, 모르는 것 있으면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고 수첩에 음식 하는 방법들을 몽골말로 적은 다음에 집에 와서 그대로 한번 해 보면서 한국 음식 만드는 방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한국에 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2008년 5월 17일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5월 24일에는 충남 예총 천안지부에서 주최한 다문화 가정 동화구연대회에서 입상하였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풍이 있는 시아버지를 잘 모신다고 성환 주민의 추천으로 천안시장님께 효부상을 받았다. 작년에는 아산상 다문화가정상을 받아 상금 1천만 원을 받았고, 상금 일부를 어려운 다문화 가정이나, 장애인을 위해 써 달라고 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방송국에서 방송출현 연락이 왔지만 저는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어려워서, 그리고 남편이 조용히 살자고 반대하여 방송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산상을 받은 이후에 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하면 상 받았던 기사가 나옵니다. 정말 신기한 일들이 생겼지요.
올 초에는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여 면허증을 얻었습니다.
제가 몽골어 통역했던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 제가 사는 성환지역을 중심으로 통번역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2009년 1월에는 몽골에서 시집온 가나를 도와 산부인과에서 첫 아이를 출산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남편이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의사선생님과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직 한국말을 잘 못하는 가나를 도와 통역을 해주어,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
몽골 사람들이 몽골에 사는 가족들을 초청하려면 초청장을 쓰러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공증을 받고 이것을 몽골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보내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초청을 하려면 초청하는 이유도 한글로 작성해야 하고 초청받아 한국에 오는 사람의 신원에 대한 것도 한글로 번역을 해야 합니다. 저는 2년 전부터 이런 번역 일도 배워 이제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시내에 나가면 몽골식당이 있는데, 그것에 몽골사람들이 많이 오고 있어 저는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아도 몽골 사람들로부터 통 번역을 부탁하는 연락을 받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제 명함을 만들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2008년 8월에는 결혼소개소를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 남자분과 함께 몽골에 가서 한국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몽골여자들과 맞선을 보도록 통역을 도와 드리기도 했습니다.
아산상을 받으면서 가장 크게 생각된 것은 “자신감”입니다. 그리고 저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지금 직장을 얻고 싶어서 올가을에 있을 “한국어 검정능력시험”을 앞두고 근처 대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강의를 들을 예정입니다.
지금은 천안 다문화가정센터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저희 두 딸 아이들을 키우면서 얻었던 학습지도 경험이 있습니다. 돈 주고 무조건 학습지 가르치는 것보다 좋은 책 사서 한 단계씩 집에서 엄마가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큰딸 명환이가 초등학교 1학년인데 제가 이런 방법으로 가르쳤더니 수준이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문화 가정에 집집마다 방문해서 공부를 가르쳐 주고 싶고 갓 시집온 엄마들에게 한국말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칠지 몰라 구체적으로 공부를 못 가르쳐 주는 엄마들에게 제가 저희 딸에게 했던 방법 알려 주고 싶습니다.
제가 한국말 하는 것, 한국음식 만드는 것, 자신감을 얻어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도록 저를 가르쳐 주신 고마우신 많은 분들 덕분이었습니다. 키우는 데 불편함이 있는 다문화가정 주부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앞으로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저는 한국말을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고, 한국문화를 몰라서 힘들어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데 불편함이 있는 다문화가정 주부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