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봉사단체에서 주로 소아암 어린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데 작년에 뜻하지않게 시각장애인을 돕는 활동을 잠시 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는 시각장애인 분의 보행교육을 돕기로 했습니다. 보행 교육이란 시각장애인이 자원봉사자나 가족의 도움없이 혼자서 목적지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성수동에 사는 의뢰인은 수유리의 맹학교에서 학사과정을 공부하게 되어서 통학하는 길을 익혀야만 했습니다.
그 분은 실명한 지 6년째라는데 정상적으로 살다가 실명한 중도실명자는 선천적인 시각장애인보다 재활하기가 더 어렵고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수동에서 수유리까지 가려면 지하철 2호선을 타고가다 동대문운동장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어디쯤에서 타면 갈아타는 계단이 가까운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야 하고 유도블록을 밟고 걷는 것이 편리한지, 벽을 짚고 걷는 것이 편리한지
직접 비교해 보아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표소의 위치며 화장실의 위치, 주변에 어떤 상점들이 있는지 등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줬습니다.
다시 하차 지점으로 돌아가서 갈아타는 역 플랫폼까지 걷기를 수차례 반복했지만 그 분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눈치였습니다. 그분에게 반복된 학습으로 길에 익숙해지는 것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것인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나를 잡지 않고 내 도움이 없이 혼자서 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낯선 길을 하루 만에 완벽하게 익히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크리스마스선물 사가지고 집에 일찍 들어오겠다고 아이에게 약속까지 했기에 다음 주에 한 번 더 도와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서둘러 마치려고 한 차례 설명을 마치고 저는 그분과 함께 전철에 올라탔습니다.
비교적 한산한 시간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한양대 역에 전철이 서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면서
전철 안이 갑자기 어수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바로 우리 옆에서 엄마 가슴에 안겨 들어온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충 칭얼대는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장난감이 아닌 다른 선물을 사 준 듯 잔뜩 화가 난 목청으로 거칠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번잡한 전철 안에서 보행교육을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조심스러웠는데 저에게 보행교육을 받으러 나오신 시각장애인 분도 많이 긴장이 되는 눈치였습니다.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자 지하철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고 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는 당황해서 아이를 더 크게 나무라니 아이는 더 크게 울고. 지켜보는 저도 참 난감했습니다.
바로 그 때, 전철 안에 잔잔한 캐롤이 울려 퍼졌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지만 낭랑하고 부드러운 음성의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부드럽게 귀에 와닿았습니다.
그 캐롤을 부른 사람은 바로 저와 함께 보행교육을 나온 그 장애인 분이셨지요. 노래를 만들기 위해 얼굴을 찡그리거나 핏대를 세우지 않고 일생 동안 소중히 다룬 악기를 자연스럽게 연주하듯 목청이라는 천부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캐롤로 전철 안 소음을 달래는 바람에 소란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렇게 세상의 많은 도움을 받는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더라구요.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그 분한테 케이크 선물까지 받고 보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오직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그날 하루 길을 익히는 것만도 힘이 들었을텐데 아이 사진을 넣어 케이크를 살 생각까지 하신 그 분에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성의 있게 도움을 드렸는지 생각해보니 많이 미안했습니다. 작은 보탬이지만 나의 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쁨에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활동이지만, 가끔은 내 생활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작은 갈등에 빠질 때도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큰 불편 없이 살 만큼 행복한 것도 세상으로부터 받은 큰 축복인데. 더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더 열심히 봉사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주 주말 그분과 함께 한차례 더 보행교육을 하게 되었는데 교육 첫날과는 다르게 자신 있게 걷고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전철을 타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놓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분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제는 혼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자신감에 찬 목소리에서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의 전철 안에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캐롤의 선율이 느껴져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