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리며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제 마음속 깊이 가둬두었던 두려움이 소리없이 밀려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슬픈 기억이 자꾸만 생각나기 때문이지요.
영원히 지우고 싶은 1993년 1월 27일, 그날도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던 제 남편은 원인 모를 전복사고로 인해 저와 어린 두 딸, 그리고 뱃속의 고운 아이를 남겨둔 채 홀로 세상과 이별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정에 태어나고 같은 처지인 저를 만나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함께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가며 얼마나 행복해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제 남편은 아이들 아빠도 아닌 그저 한 구의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보처럼 남편을 차가운 겨울 산에 묻고는 돌아서 보니 제게 남겨진 것은 새까만 눈망울을 말똥거리는 5살, 3살 된 두 딸 아이와 바깥세상 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뱃속에 단단히 웅크리고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문득 아이들 눈동자 속에 비춰진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홀로 남겨진 것이라면 절망스런 그 모습이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슬픔과 좌절, 고통과 괴로움, 아픈 마음까지도 모든 것이 제게는 사치였으며 그 누구보다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 할 큰 이유가 있음을 아이들 앞에서 깨닫게 되었지요.
살아야만 했습니다. 우선 살아남기 위해 군청 사회복지과를 찾아가 모자원이라는 곳을 소개받고 그 곳에 입소하였습니다.
입소 후 얼마 안 있어 세상 그 어떤 아이보다 예쁘고 소중한 막내딸이 태어났지요. 아빠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태어나기도 전에 주위 사람들에 의해 열두 번도 더 제 곁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이입니다. 아이를 낳아 다른 집에 주자는 의견들을 제게 말할 때마다 단호히 거절하며 눈물을 삼키며 지켰습니다. 당시 제 나이 26살이었으니 어찌 보면 주위 분들의 걱정은 당연했지요. 친정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동생들만 4명인데다
시댁 또한 빈곤했으니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친정 여동생에게 딸아이 둘을 1년만 돌봐 달라고 어렵사리 겨우 부탁하고 내려와 한 달 된 딸아이를 업고 산후 붓기조차 채 빠지지 않은 퉁퉁 부은 얼굴로 홀로서기를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어떻게든지 살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이를 악물어 가며 미용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미용학원 원장님의 따뜻한 배려로 당신의 방에 젖먹이 아이를 두고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발버둥을 친지 6개월 만에 미용사 자격증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기뻐할 겨를도 없이 특강을 받았고 아이들 보육문제로 취직을 하기보다는 모자복지기금 융자를 받아 조그마한 미용실을 개업하였습니다. 비록 허름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제게는 아이들과 희망을 꿈꿀 수 있는 너무도 소중한 공간이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며 당당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세 딸이 아무 탈 없이 건강히 잘 자라주기만을 기도하면서요. 그리 넉넉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에는 다시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희망의 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먹구름이 우리 앞을 가렸습니다. 2005년 3월 20일, 붉은 화마가 미용실을 덮쳤습니다. 누군가의 방화였지요. 또 다시 찾아온 시련 앞에 사람들의 차가운 말 한마디는 비수가 되고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힘이 되더군요. 제가 누군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면 너무도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올라 병원을 찾아 상담받으며 마음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제게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세 딸이 있었으니까요.
다시 한 번 오뚝이같이 살자는 마음으로 일어서야만 했습니다. 낮에는 미용실에서 밤에는 성인오락실에서 오로지 돈을 벌어야한다는 일념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일을 하던 중 성인오락실이 문을 닫아 제게는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예전에 이웃집 아주머님께서 지역자활센터의 간병사업단에 대해 말씀하셨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YMCA에서 간병인 교육수료증도 받아 놓았기에 이참에 제가 가진 기술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머리도 깎아주고 간병도 해 드리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지역자활센터의 문을 두드려 보게 되었습니다. 이력서를 접수하고 며칠을 기다리다 보니 상담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오더군요.
상담결과 간병사업단에는 이미 자리가 없으니 청소사업단일을 해 보실 의향이 없는지 물어보셨고 무작정 무슨 일이든지 해보겠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바로 청소사업단에 투입되어 공중화장실 청소 및 기타 쓰레기도 주웠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서 한동안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미용실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살았는데 세상의 이목이 신경 쓰이고 세 딸이 엄마가 하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일날 교회에 나갔더니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알아차리시기라도 하신 듯 설교 제목이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살자!”였습니다.
그래도 세 딸이 엄마 일에 대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답니다.
“친구들과 지나가다가 엄마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아는 체하지 않아도 돼. 너희 입장도 있으니깐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을게. 엄마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내가 일을 해서 너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
이렇게 2007년 1월 18일부터 서천지역자활센터의 금강하구둑 놀이공원 청소관리 일을 시작으로 그 해 3월 2일, 새롭게 시작되는 자활 근로 사업단인 서천군 관내 공중화장실 관리를 하는 새날 위생관리 사업단에 참여하여 지금은 어엿한 새날 공동체의 반장을 맡고 있습니다.
자활 근로를 하면서도 퇴근 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밤에는 치킨 호프집이나 주점에서 주방 일을 하며 열심히 밤낮으로 일하다 보니 제 이름으로 된 어엿한 집도 장만하게 되더군요. 지금은 좀 쉬어가며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방송통신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답니다.
엄마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세 딸은 흔한 학원 하나 보내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를 잘해 주더군요. 현재 첫째 딸은 전문대 피부미용과를 졸업하여 미용실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둘째는 교육대 3학년에 재학 중이고 막내딸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답니다.
이제는 어떤 시련이 닥친다 해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감에 있어 자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아이들 아빠에게 말하고 싶어요. 걱정하지 말라고요. 먼 훗날 만나거든 그때 잘 해내었다고 그저 함께 조용히 웃어 달라고요.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마세요. 웃음이 없을 것 같아도 조용히 미소 지으실 날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끝으로 제가 이렇게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서천지역자활센터 새날 공동체가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일하며 더 큰 행복을 저 혼자가 아닌 우리 사업단의 참여주민과 그리고 지금도 지역자활센터에서 꿈을 키우고 계신 모든 분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