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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외눈여자의 일기
  • [자활성공수기 | 201107 | 정규순님] 한 외눈여자의 일기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눈은 따갑고 머리는 술에 취한 듯 어지럽다. 아직 한낮도 아닌데 칠월의 여름볕은 작살처럼 따갑다. 모두들 날이 선 표정이다. 나는 몇시간째 논바닥을 기고 있다. 장마에 내린 비로 논바닥은 갯벌처럼 엉망진창이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물장화를 신은 발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논바닥에서 떨어지질 못한다.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오늘 논에 쑥쑥 자라나는 이 징한 잡초 다 뽑아야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하우스에서 익어가는 토마토를 따야하고 벌레 먹고 있는 고추에 약도 쳐야 한다. 건조장에 있는 감자도 선별하여 상자에 넣어 경매에 넣어야 하고 작년에 수확한 벼의 보관상태도 살펴야 하고 쌀 도정도 해야 한다. 이 많은 일을 60살이 넘은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와 다리 수술을 앞둔 젊은 아기엄마와 간이 좋지 않아 늘 피로감에 시달리는 나이 든 남자가 해내야 한다. 나는 아픈 허리를 겨우 펴면서 한숨을 내쉰다. 제발 저 해가 오늘 하루만은 눈을 감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런 나의 간절한 바람을 비웃듯 햇살은 더욱 더 강렬해진다.
바로 뒤에 있던 여자가 “아. 짜증나. 아이 낳을 때보다 더 힘드네”하고 말하자 주위의 몇 여자가 덩달아 불평과 짜증을 쏟아낸다. 오늘 처음으로 지원해 온 도배사업단의 젊은 여자이다. 실내에서만 작업해 온 여자여서 그런지 피부가 우리 영농사업단 여자들과는 딴판으로 하얗고 곱다.
“그럼 좀 쉬고 다시 시작합시다” 나는 할수없이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러자 모두들 기다리기나 했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논에서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러다간 이번 주 내내 잡초 뽑기에 매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일체 제초제나 농약을 쓰지 않은 유기농 농법이니 이렇게 일일이 사람의 손이 가야한다. 아이들이 줄어들어 폐교가 된 지 오래된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두들 드러누워 있다. 나는 냉동실에 넣어둔 차가운 물을 한 사발 마신다.
모두들 지친나머지 말없이 날 선 눈빛으로 휑하니 적막한 운동장만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일해야지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의 서글픈 인생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월급날이 되면 은행 앞 자동지급기앞에 쭈그려 앉아 월급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가 바로 저들이다. 월급이 들어온 지 불과 열흘도 안 돼 잔고가 없는 채 다시 이렇게 논이나 밭에 앉은뱅이 여자처럼 쭈그려 앉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원망하고 짜증내고 후회하는 일상의 습관이 몸에 배여 상대방이 한 마디만 자신의 상처나 치부를 건들면 바로 달려들기라도 하듯 거세진다. 이렇게 평생 몸뚱아리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늙은 여자들이다. 남편의 폭력과 알콜중독, 사업실패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아왔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게 가족과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야 하니까 견딜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무게, 삶이라는 무게가 바위 보다 더한 무게로 짓누른다는 것을 나는 안다.
몸이 성한 사람도 그 무게로 고초를 겪는데 성하지 않은 나는 보통사람이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대여섯살 때였을까, 나는 이사를 잘못 간 후유증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왼쪽 눈이 멀어버렸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수술도 할 수 없었고 결국 나는 영원히 한 쪽 눈으로 세상을 봐야하는 삶을 살아가야했다. 그나마 온전한 한 눈마저 다친 눈을 닮아가는 지 갈수록 시야가 흐릿하다. 하지만 나는 농사를 짓는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멀쩡하지
않은 이 외눈으로도 한 세상을 너끈히 살아갈 자신이 있다. 신선한 찰토마토와 튼실한 감자, 알싸하게 매운 고추, 윤기나는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 나는 포기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두고 독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독한 것이 아니라 즐겁게 일할 뿐이다. 나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작물들은 부지런한 나의 정성만큼 정직하게 자라준다. 나는 이 외눈으로 작물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한 쪽 눈으로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바로 내가 땀 흘려 키운 작물이다. 나는 농사를 짓는 것에 한 치의 후회도 두려움도 없다.
속이 까맣게 변색된 감자를 가지고 와서 불평하는 소비자에게 나는 ‘감자의 속을 사람이 알 수는 없는 법’이라고 해명하면서도 속 썩히는 감자에게 화풀이를 한 적은 없다. 내가 생산한 신선한 토마토와 쌀, 감자와 고추, 쌈채소를 기다리는 소비자를 생각하면 더더욱 후회가 있을 수 없다. 나는 단 한번도 이들 소비자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후두둑 비가 쏟아진다. 멀쩡한 하늘에 천둥이 치면서 소나기가 뿌려진다. 정신없이 쓰러져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선다. “참내 하늘마저 우리 편이 아니네”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논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람에게 맞춰진다해도 이 농사를 짓는 일만은 사람이 하늘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자활공동체에서 지난 1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것은 바로 사람이
감자에게 맞추고 토마토에 맞추고 벼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전 덥다고 투덜댔으니 이젠 할 말이 없겠지요? 오늘 돈 안들이고 목욕한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일 시작합시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빗줄기가 거세진다. 땀과 비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잡초 반, 모 반의 한복판에서 연신 눈에 들어가는 빗물을 훔치며 나는 다시 일하기 시작한다. “아이고 참말로 시원하게 쏟아붓네... 어디 누가 노래나 한 곡 불러보시지” 그러자 어느 한 사람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다던 한 여자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발에 부딪치는 뻘밭 소리까지 하나가 된 듯 주위가 고요해진다. 나는 뿌연 눈을 연신 닦아내며 행복감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