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 빚보증과 빌려준 돈을 모두 잃은 탓에 남은 것은 빚 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살아 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쓰러지고 싶었고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돈잃고 사람잃고.. 마지못해 식당을 운영하며 하루 매출에 대부분을 빚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주고나면 물건을 사서 장사할 돈마저 없는 어려움이 계속되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놓여진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힘겨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두통을 앓던 둘째딸아이의 ‘뇌종양’판정. 정말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는 것, 멈추고 싶어도 멈추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 슬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정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휴지를 입에 물고 울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리고 대학병원에 찾아가기 위해 소견서를 받아들고 나왔습니다.
딸아이는 느낌이 이상한지 왜 그러냐며 물었습니다. 무슨말을 해야 할지.. 아직 어리기만한 아이에게 그 병을 무어라 설명해야할지.. 말문이 탁 막혔습니다.
하지만 약해질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제 딸이고, 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엄마’이니까요. 뇌종양과 맞서 볼 수밖에요.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를 앉혀놓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일단 큰 병원에 가서 검사부터 받아보자. 아닐 수도 있지 않겠니? 만약에 뇌종양이라고해도 엄마랑 같이 이겨내자.”라며 약속을 했습니다.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검사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3개월의 시간들. 서울아산병원과 원자력 병원의 두 곳의 검사 결과는 뇌종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딸이 뇌종양이 아니랍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께, 부처님이 계신다면 부처님께. 세상 모든 이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우리딸이 뇌종양이 아니랍니다! 희망이 보였습니다. 몸이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살맛이 났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해야 했습니다.
손님이 없는 낮시간을 이용하여 일자리를 찾던 중 2007년 11월, 그렇게 자활이라는 곳과 인연이 닿았습니다.
낮에는 중구자활청소사업단에서, 저녁에는 집에 와서 몇 팀 안 되는 식당 장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살림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 했습니다. 너무 무리를 한 탓일까요? 몸에 적신호가 들어왔습니다.
2009년 5월 중순쯤에 허리에 무리가 오면서 척추관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또 다시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수술만은 피해보려 이병원 저병원 찾아다니며 주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허리통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몸에 무리가 갈뿐이었고 방법은 수술뿐이였습니다.
2010년 1월, 로보트처럼 걸어서 충대병원에 갔습니다. 양쪽 척추 뼈에 나사를 박고 양쪽에 쇠기둥을 세워 고정시키는 수술. 5시간의 대수술 후, 밀려드는 통증에 눈을 떠보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한다는 간병사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가족들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건강을 돌보지 않은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수술 후 이틀만에 먹은 미음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며 내과, 외과, 정형외과 등 온종일 검사하는 탓에 팔등은 주사바늘자국으로 가득했습니다.
몸이 지쳐갈수록 마음도 약해지고 죽음의 문턱에 다 다른것처럼 삶을 포기해야하나? 방법이없는걸까? 아직 어리고 불쌍한 딸들을 어떻게하면 좋을까? 시각장애 2급인 남편, 색맹까지 와버려 활동능력이 94%나 상실해버린 남편이 아이들을 잘 맡아 길러줄 수 있을까? 죽는다고해도 죽을수가 없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잡혀지지 않는 고열과 설사. 더 이상 먹은것도 없어서 나올것도 없는데 하루면 기저귀 열개 이상을 써야했습니다.
간병하는 여사님이 침대를 끌고 화장실을 겸한 목욕탕을 하루에 열번 이상 찾아가다보니
지쳐가실무렵이었습니다. 가족과 주위사람들의 염려 덕분이였을까요. 8일째 저녁부터 조금씩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9일째 드디어 다시 미음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살아났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은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지나 온 시간보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아끼고 더욱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병원에서 무료한 시간들을 이용하여 3년전에 사두었던 요리기능사 문제집을 조금씩 풀어나갔습니다.
첫번째 시험에 합격하리라 굳게 결심하고 문제를 풀고, 외웠습니다. 물론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음과 조용한 환경이 아니라 불편함도 있었지만 문제집을 볼 때는 재미있었고 살맛이 났습니다. 어쩌면 통증을 잊고자 더욱 더 열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씩 움직이면서 퇴원 후 식당일도 도왔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손님 한분 한분께도 감사했습니다.
5개월쯤 지났을 때 정기검진을 받기위해 충대병원으로 갔습니다. 검사 결과 사진을 본 의사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오른쪽 기둥을 세워 둔 볼트가 풀려서 재수술을 해야된다는 청청병력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둥이 아직 굳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많이 몸을 움직여서 풀려버렸다는 것이였습니다.
수술이라는 현실 앞에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지만 인정해야했습니다.
6월 초순 다시 5시간의 대수술, 한번하기도 어렵다는 그 수술을 저는 두번이나 한 사람입니다.
재수술 후에도 필기시험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7월 10일, 2차수술 한달만에 시험을 보았습니다. 역시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습니다. 보정기를 차고 앉아있기조차 힘겨웠지만 당당하게 합격했습니다. 기쁘고 뿌듯하고 자심감도 생겼습니다.
시간은 흘러 10월 초순 중구자활 인큐베이팅사업단에 입사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중구청에서 20만원을 지원받아 한식실기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배웠습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첫시험의 불합격. 저의 노력이 부족했다 생각하며 합격할 때 까지 도전할 것입니다. 지금은 능력개발카드를 만들어서 양식실기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방송통신고등학교의 입학도 계획중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과 주위의 모든 분들께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고싶습니다. 기회는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2010년 한 해를 고통, 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지만 목표를 가지고 노력했고 많은 도움도 받으며 전화위복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좌우명은 언제든,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기회고 찬스가 될 수도 있고, 후회만 남을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회에 도전할 수 있도록 튼튼한 발판이 되어준 중구자활인큐베이팅 사업단 담당자님과 주위분들에게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