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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정한 언어는 우리의 언어일뿐
  • [수화체험수기 | 201109 | 김의선님] 우리가 정한 언어는 우리의 언어일뿐
청각장애2급인 엄마와 반신불구가 되어 지체장애3급인 아버지는 작은 구멍가게를 하셨고 그것이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유일한 부모님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집을 벙어리장애인집 이라고 불렀습니다. 동네아이들은 엄마가 나가시기만 하면 “벙어리래요 벙어리래요~”하고 놀려댔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사춘기가 오기전까지는 엄마를 따라 시장다니는것을 좋아했고, 아버지를 따라 물건 떼러가는걸 좋아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큰 마트로 물건을 떼러 가는날이면 절룩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주는 일은 4남매중 막내인 저의 몫이었습니다. 일찍이 초등학교5학년에 사춘기가 온 저는 아버지가 큰마트에 물건을 떼러가는 날이면 어두운 연탄창고에 쪼그려 앉아 숨죽이고 숨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를 찾지 못하면 작은언니가 아버지 뒤를 따라가야 했기에 언니는 내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잘 찾아냈고, 전 끌려나가듯 온몸에 검은연탄재가 묻은채로 리어카를 잡고 따라가야했습니다. 검은고무신을 신고 절룩거리는 아버지를 보는 불쌍한 시선과 그 뒤로 이어지는 나를 보는 불쌍한 시선이 난 죽기보다 싫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우리학교 아이들이 탄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언덕위로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시던 아버지 뒤에있던 저는 그만 꽉잡고 있던 리어카를 놓고 도망가려했고, 아버지는 리어카와 함께 언덕아래로 굴러버렸습니다.
배가 심하게 압박이 되어 갈비뼈가 부러지셨고 심한 찰과상도 입었습니다. 하지만 전 다친 아버지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싫었고 또 무서워 아버지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앞만 보고 그냥 달려가 버렸습니다. 한적한 골목의 담벼락 밑에서 전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다 전 생각했습니다. ‘난 강해져야해.....’
6남매중 장녀로 집에 일을 도맡아 하시던 엄마는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셔서 문맹이었습니다. 문맹이라 일반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수화를 배우는 일은 일반인이 타국어를 배우는것과 마찬가지로 힘들게 느끼셔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엄마는 늘쌍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모르는 이 바보. 죽어버려야겠다...” 농담삼아 답답해서 하신 말씀인걸 알지만 전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간곳은 교회농아부였습니다. 엄마같은 청각장애인분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끼쳐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엄마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전 목사님을 통해 수화를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에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수화를 배우기를 넉달이 되었을까요. 자음에 모음까지 지화의 단계를 마스터하고 초등학교 수준의 언어는 수화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숫자 영어까지 마스터하는데는 1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나는 어느새 엄마의 수화 선생님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글도 모르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엄마에게 제일 쉽게 수화를 가르칠수있는 방법은 그림이었습니다. 엄마는 다행이도 형편없는 내 그림실력이지만 엄마는 모범생 처럼 곧잘 알아채셨습니다. 손의 모양을 그림으로 적은것만 10권이 되었습니다.
공책을 펴보면 손모양이 난무하여 누가보면 무슨 암호를 기록한 공책인가 싶겠지만 엄마는 수화공책을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내가 수화를 배우게 된 동기는 부모님의 장애를 뛰어넘게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엄마에게 가르쳐 드리기 위해 배운 수화는 나 자신을 변화시켰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수 있게 해준 통로였습니다. 인간세상에서 언어를 통하면 장애로 취급받지만 청각장애인들의 세상을 경험한 나는 다른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청각장애인들의 언어는 눈과 손이라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