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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년 만에 시작하는 소중한 나의 꿈
  • [장애극복수기 | 201111 | 진용섭님] 17년 만에 시작하는 소중한 나의 꿈
17년 동안 날 싸고 있던 단단한 알껍데기를 부수고 한발 한발 다시 앞으로 나가고 있다. 내 나이 벌써 50을 바라보지만, 희망이 있는 한 이젠 멈추지 않을 것이다. 충북괴산에서 태어나 힘들게 살면서 아픔까지 동반되었다. 2살 무렵 심한 소아마비를 앓은 이후 왼쪽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쪽다리를 저는 날 보며 친구들은 놀려대기 일쑤였고, 항상 난 혼자였다. 계속되는 외로운 어린 시절. 청소년이 된 10대 때도 역시나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사람이 좋았고, 사람의 정이 그리웠었다. 그래서인지 난 어려서부터 언제나 라디오를 들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장애인을 위한 무료기술교육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은 부산. 그리고 내 나이 19살. 당연히 집안의 반대는 엄청났었다. 하지만 난 아픈 다리를 이끌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내 앞가림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 이였고, 이렇게 놀림 받으며 숨어 지내는 삶 따윈 살고 싶지 않았었다. 호주머니에는 딱 부산과 괴산 왕복 차비뿐 이였다. 그곳에서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나전칠기를 만난 것이다.
나전칠기 작품은 칠하기와 자게를 붙인 후 다시 칠을 하는 반복 작업이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다보니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하는 사람은 적었다. 난 절박했다. 이것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남의 도움만 받고 사는 힘없는 장애인에 불과할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아픈 다리를 무시한 채 칠하기와 자게붙이기 두 작업을 악착같이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 절박함과 악착. 나의 노력들이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너무 행복했다.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 영원히 장애인이라는 편견을 안고 살아야 했던 내 운명을 내가 내 스스로 버렸던 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왼쪽다리가 드디어 탈이 나기 시작해버렸다. 이 행복을 깨버리고 싶지 않은 바보 같은 욕심 이였을까. 남들에겐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아픔에 시달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나전칠기를 잠시 손에서 놓은 후 여수 신풍애양원에서 다리수술을 받게 되었다. 난 다리수술과 동시에 제 2의 인생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내 아내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였지만 그녀는 나에게 손이고 발이고 전부였다. 그러던 중 아내는 첫째 딸을 임신하였고, 부산과 여수를 오가던 우리는 95년 여수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을 때쯤 한국이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하게 되었고 돈이 말라버리면서 모두가 가게 문을 닫았던 칠흑 같은 그 시기, 나에게도 그 어둠이 찾아왔다. 나전칠기 작품의 경우 상대적으로 고가이다 보니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난 자연스럽게 나전칠기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기에, 이젠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 생겼기에 평생의 내 소중한 꿈을 놔버렸다. 그때부터 택시 운전대도 잡았고 열심히 돈을 모아 조그마한 슈퍼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은 점점 나아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나전칠기를 지울 수가 없었다. 돈을 모아도 즐거움을 잃었고, 사람을 만나도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난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2011년 6월 22일. 목포에서 열린 전남 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 참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나전칠기 공예가로. 나전칠기를 손에서 놓은 지 꼭 17년 만이였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하였다. 17년 만에 시작하는 거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면 좌절하고 실망할까봐.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전칠기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대회전날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예전엔 인정받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였다지만, 지금은 간절히도 원하는 소중한 그 일의 시작이니까. 누구보다 기쁘게 참가하고 열심히 했다. 결과가 어찌되든 이젠 마지막이 될 작품이겠지 생각하며. 결과 따윈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오는 9월 전국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어 다시 한 번 내 꿈을 펼칠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서 우승을 하게 되면 세계대회도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꿈을 잃고 살지만 않으면 반드시 언젠간 이루어진다는 그 말이 나에게 현실로 일어났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30년 전 나전칠기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졌던 나만의 마지막 꿈. 진용섭 나전칠기 공방을 위해 난 끝까지 이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