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가운데 한줄기 빛이 비춰서 다시는 어두움을 찾아볼 수 없는, 희망이 가득 찬 저의 삶을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늘 “밝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는 결코 밝을 수만은 없는 삶이지만, 그럴수록 더 밝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74년 어느 가을에 예쁜 딸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던 저는 8개월이 되던 어느 날 열병으로 인한 경기로 인해 뇌병변1급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남들은 평범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전 몇 배나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 않으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가장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공부였습니다. 휠체어 때문에 버스를 탈수가 없어서 도보로 1시간이 넘는 거리를 여름엔 우산을 쓸 수가 없어서 비를 맞고, 겨울엔 눈을 맞으며 그렇게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며 공부하였습니다. 이 모든 길에 어머니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나, 잠이
부족해 무리가 됐는지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마지막 시험날짜를 앞에 두고 공부를 중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소망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생각에 순간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도저히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2년여의 시간 동안 쉬면서 저는 이 불편한 작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2년 동안 공부를 쉬다보니 또다시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남들과 달랐기 때문에 평범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저이기에 공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중에서 처음으로 도전했던 것은 피아노반주였습니다. 제가 피아노에 도전하겠다는 말과 동시에 부모님께서는 바로 피아노를 사주셨지만 피아노 학원에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의 손가락은 힘도 많이 떨어지고 동작도 느린 편입니다.
그런 저에게 누가 피아노를 가르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택한 길은 독학이었습니다. 집에서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놓고는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온몸에 힘을 다해서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또 누르며 그렇게 독학하며 연습을 하여서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다녔던 교회의 반주자가 어느 날 갑자기 출석을 하지 않았고, 저를 늘 옆에서 지켜보시던 전도사님께서는 저를 무조건 앉아서 피아노 의자에 앉혔고,
두려움도 앞섰지만 혼자서는 의자에서 내려올 수도 없었기에 조심스레 반주를 시작하였습니다.
페달을 밟을 수 없는 저를 위해 페달 위에 무거운 가방을 슬쩍 올려놓으며 ‘파이팅’을 속삭여 준 전도사님의 배려에 또 한 번 힘을 내어 온힘을 다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며 반주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우리 부모님은 물론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이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10여년이 넘도록 교회에서 반주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장애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기에 저의 도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음 도전 목표는 컴퓨터 공부였습니다. 작은 손으로 마우스를 쥐고, 손에 쥐가 날정도로 열심히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등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2년 정도 일반 기획사에서 웹디자인과 인쇄디자인 일을 하며 첫 사회생활을 하였습니다.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난 친구를 통해 비인가 장애인 시설 한 곳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회복지현장을 접하게 되고, 운명같이 또한 필연처럼 제가 하게 된 일은 사회복지분야였습니다.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그 비인가 시설에서 3년간 봉사를 하였습니다. 사무의 전반적인 일과 모든 행사준비, 회보제작, 후원자 관리, 전화업무과 회계(재무)관련한 실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인가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거의 수기로 장부의 기장 및 전표를 계산하고 경비지출 및 출납, 수납에 관련한 사무를 보았습니다. 그 일은 꼼꼼한 제 성격에도 잘 맞았고, 또 원하던 사회복지 분야 이다보니 정말로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일을 좀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포기했던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마치고, 사이버대학에 진학하여 낮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 공부하여 드디어 소망하던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유대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인가 시설에서 10년 정도 생활을 하면서 직장생활에도 재미를 느끼고, 조직에 빨리 적응하여 직원으로서 주어진 업무를 진행해왔습니다.
이제는 그 곳을 떠나 경기도 이천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엘리엘동산 한마음일터에서
사회복지사로서, 회계 담당자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저에게는 도전이었습니다.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장소를 떠나 새로운 환경을 만난다는 것 그 자체가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도 표정만으로 통하는 편한 사람들과 휠체어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편한 장소를 떠나야만 했을 때에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스니프와 스커리처럼
“또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을 하며 변화에 잘 적응하며 두려움 없이 업무를 진행해 나갈 수 있을까?”란 의문을 가져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가 한 곳에서만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오히려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고, 저의 생각은 그쪽으로 굳혀졌습니다.
사람들이 안 된다고 부정할 때, 피아노도 배웠고 멀고 먼 길을 오가며 검정고시도 마쳤고 사무/회계 업무를 보면서도 필요할 때 아이들 도시락도 쌌던 나인데 안정이 되니 안주하고 싶어진 저의 내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전한 그 새로운 환경이 지금의 한마음일터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쌓아온 경력들과 제가 가진 모든 달란트들을 이곳에서 쓰임 받고 싶었고 내가 일하는 즐거움을 알기에 이곳으로 출근하는 많은 장애인들의 마음을 더 잘 알기에, 또한 어려움을 극복한 선배이기도 하기에 아침마다 출근을 체크하는 장애인들의 카드 찍는 소리는 늘 경쾌합니다. 환경이 바뀐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나 장선희, 제가 이루어 낸 또 한 가지 일은 변화에 적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무엇을 도전할까? 아직 다음 도전목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해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가슴에는 많은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이 사회복지현장에서 인정받는 인재로 성장할 것입니다.
오고가며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더 간절하게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때로는 아파하기도 하며 마음을 나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은 힘들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얘기는 잘 경청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담과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서 앞으로 상담학을 공부해서 마음의 장애도 함께 어루만지며 치유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일터로 출근하는 우리 한마음일터 가족들이 참신한 아이템으로 일에 대한 대가를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한마디로 일터 가족들이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 되도록 힘쓸 것입니다. ‘장애’가 내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장애를 통해서 나를 지으신 주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하시고, 더 큰 세상으로 뻗어나가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서른 중반을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까지보다 앞으로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내려주실 더 큰 은혜와 사랑이 있기에 내게 주어진 일들을 기쁨으로 잘 감당하며 겸손하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